2부 자홍의 상흔(Scar of Magenta) 1화 "그럼 잘 청소해 봐라. 난 좀 바빠서 말이야." 전혀 바빠 보이지 않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는 돌아 나갔다. 소년은 그런 뒷모습을 보고 다 시 돌아서 한숨을 내 쉬었다. "하긴 빽도 없고 딱히 눈에 띄게 잘하는 것도 없는 녀석이니 당연한 일이려나?" 윌의 앞에는 광활하고도 너저분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밤비가 내리던 그 날, 윌은 에스토니아 군에서 탈주했다. 단 한 번의 달콤하고도 쓰디쓴 추억을 간직한 채 그곳에서 도망쳤다. 어느새 지크 황자를 사모하게 되었다. 감히 분수에 맞지 않는 마음을 품었으나 그저 마음 만 간직하고 있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났다. 윌에게 지옥 같은 기억의 단편으로 남아있었던 노파가. 그제서 야 알았다. 자신이 감히 마음도 품어서 는 안 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분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그래 도 단 한번이라도 꿈을 꿔보고 싶었기에 그분을 유혹했고 전하는 그런 자신을 안아주었 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셨다. 그것만으로도 윌은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에스토니아 군에 있었던 것은 4달 남짓, 거기서 탈주한 것은 유토나 군에서 탈영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년을 채우지 못했으니 돌아가는 것도 감히 꿈꿀 수 없다.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아버지 곁에서 평온한 삶을 영 위하는 것보다 태자의 안위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의 곁에 붙어있어 어떻게든 폐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먼발치에서나마 보고 싶었다. 황자가 자신을 잊 어버린다고 해도 멀리서나마 그분을 지켜보며 사모의 정이라도 간직하고 싶었다. 그런 마 음이 윌에게 정말 담대한 일을 하게 했다. 윌은 지금 에스토니아 궁성에 와 있었다. 전장에서 제노아까지 걷고, 마차를 얻어 타면서 스무날이 걸렸다. 도시란 좋은 곳이었다. 푸대 자루 같은 옷을 둘둘 감고 상경한 빨강머리 촌뜨기 따위에게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 았다. 에스토니아 군에 잠입할 때 썼던 위조신분증은 이름만 바꿔치기 했다. 윌 로 루쥬라 고 써진 신분증을 가지고 윌은 제노아 골목골목을 서성였다. 에스토니아의 왕성인 제노아 성은 3개의 성곽에 싸여 있었다. 윌은 3곽 주위를 돌아 걸었 다. 제 5문 앞에서 문지기에게 말을 걸었다.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 혹시 성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느냐 고. 문지기는 고개를 잠시 갸웃하다가 소리쳐서 사람을 불렀다. 이내 문안에서 한 지저분한 차림의 사람이 한 명 튀어나왔다. 문지기가 그에게 몇 마디 하는가 싶더니 그가 윌을 위아 래로 훑어보고 물었다. 할 줄 아는 게 뭐냐, 라고. 윌은 뭐든지 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 대답이 맘에 드는지 윌의 신분증을 들여 다 보고는 윌을 안으로 데려가 한 시종에게 보였다. 시종은 윌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이내 윌을 채용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윌은 제노아 성 한 켠에 있는 축사의 돼지치기로 일 하게 되었다. 제노아에 온 첫날, 제노아 성안에서 잠을 청하며 윌은 뭐라고 말하기 힘든 행복을 느꼈 다. 이제 비록 황자의 가장 가까이에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은 지붕아래 있을 수 있 게 된 것이다. 이제 전쟁도 끝나 지크 황자가 제노아로 돌아오면 발치에서라도 나마 그를 우러러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양부에 대한 은혜를 갚지 못하고 와 버린 것 뿐 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윌은 언제나 그렇듯이 열심히 일했다. 단지 예전에 군대에 있었 을 때와 다른 것이었다면 그의 상급자들이 윌의 노력을 인정해주었던 것이 아니라, 꽤나 편한 것으로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윌은 열심히 일하지만 딱히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파벌이나 무리에도 끼지 않는다. 적 당히 부려먹기 좋기는 하지만 여럿이 일하는 축사에서는 사실 약간 거슬리는 존재였다. 하 인들이 여기저기서 쑥덕거리는 것은 쉬이 윌의 눈에 띄었다. 윌은 언제나 그렇듯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어느 샌가 이곳에 오게 된 것 이다. 눈앞에 광활하고도 너저분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제노아 왕성에는 꽤나 후미지고도 을씨년스러운 곳이 있다. 위치라면 1곽 안쪽, 본궁의 동쪽 끝에 있는 곳으로 꽤나 중심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곳이었으나 어쨌든 1년에 세 번 환성절(별이 돌아오는 날 이라 하여 새해를 뜻함)과 건국기념일, 대월일(가을의 달이 가장 큰 보름날. 추수 감사일이라고도 함)에 신관이 신성한 불을 가지러 잠시 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적도 방문도 없는 곳이었다. 이름은 화룡정, 에스토니아의 건국 때 시조를 도와주었다는 화룡 로드니를 모시는 곳으로 그의 신성한 불을 모시는 곳이었다. 에스토니아 왕성이 세워질 때 만들어졌다는 곳으로 벌써 만들어진지 300년이 넘은 신전 이었는데 전란에 에스토니아 왕성이 불탔던 때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곳이라 했다. 그러나 그런 것도 과거의 영광일 뿐 전설로나 내려온 용의 신전 따위는 일 년에 세 번 불을 가지 러 올 때를 빼고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모를 만한 곳인 것이다. 그렇게 인적은 드문데 대지는 넓고, 빼놓지 않고 매달 보름과 그믐에는 제사는 안 지내도 제물은 올려야 했다. 제 노아 성에서는 그 곳에 배정 받는 것이 최악의 좌천으로 손꼽혔다. 그리고 윌은 제노아 성 에서 일한 지 한 달째 되는 지금 그 화룡정에 배정을 받은 것이었다. 넓고 넓은 화룡정에 사람이라고는 윌 하나뿐이었다. 윌이 확인해 본 바로는 담당도 윌 하 나 뿐으로 숙식도 화룡정 안에 있는 작은 숙사에서 해결하게 될 터였다. 오히려 윌은 안심 이 되었다. 이런 곳에 혼자서 배정 받은 이상 절대로 일자리에서 짤릴 걱정은 없을 터였 다. 이제 안심하고 제노아 성에 눌러 붙을 수 있다. 죽을 때까지 황자와 같은 지붕아래에 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윌은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이곳은 일 년에 세 번 오는 신관 외에는 외부인은 아무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곳 이다. 이제 이 안에서 일할 때에는 이렇게 둘둘 감고 다닐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윌은 기 뻐하며 두건을 벗어 던졌다. 갑갑하게 싸고 있던 겉옷도 벗었다. 왠지 일하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때였다. "너, 누구지?"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 낮에도 큰 전투가 있었다. 황자가 이끄는 에스토니아 원정군은 이번에도 대승을 거두며 전선을 10여 킬로미터나 전진시켰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운 진지에는 전투의 여운보다 는 조용한 휴식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불이 켜진 막사가 하나 있 었다. 원정군의 부장인 라딘칼의 막사였다. 막사 안에는 세 사람이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 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수도인 아라벨이 있는 황제 직속령 뿐입니다. 유토나의 아홉 가령 중에 하나밖에 안 남다니......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만 저는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마르께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에 쥔 술잔은 반정도가 비워진 채 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형님이 너무 위태로워. 눈에 다 보인다고 흔들거리는 게." 라딘칼이 응수하며 잔을 비웠다. 그 눈도 침통하게 가라앉아 있다. "역시 윌의 실종 때문이겠죠. 그 사건 이후 2달, 그 동안에 유토나의 아홉 가령 중 다섯 가 령이 점령되었습니다. 유토나의 저항도 만만치는 않았었는데, 지금의 태자 전하는 무서울 정도입니다." 랑빌이 병을 들어 술잔을 채웠다. 그의 목소리 역시 씁쓸함이 묻어난다. "전하는 윌이 납치된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빨리 유토나를 함락시켜 윌 을 되찾겠다, 라는 생각이진 것 같더군요." "전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솔직히 저는 윌이 납치된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더 걱정입니다." 마르께스의 말에 랑빌이 그렇게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랑빌에게 집중되었다. 랑 빌은 한 번에 잔을 비우고 계속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윌이 납치되었다면 그 자리에 머리타래가 남아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 까. 누군가 황자의 침실까지 침입해 전하의 침대에서 그 애첩을 전하가 눈치 채지 못하게 납치해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에스토니아 최고의 전사인 전하를 상대로는 절대로 무리입니다. 게다가 저항한 흔적도 없이 윌의 소지품도 챙겨서, 연인의 정표로 흔 히들 주고받는 머리타래를 남기고 납치를 해 간다는 것은 역시 어불성설이죠." "역시 그런가. 윌이 스스로 떠난 것인가." 라딘칼은 침통하게 고개를 숙였다. "머리타래를 남겼다는 것은 역시 그 날 밤에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겠지? 그래 서인지 형님 상태가 영 더 안 좋다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야. 저런 연애바보가 제대로 빠져 버렸으니까." "정말 걱정입니다, 만 더 심각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도 헛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뭔가?" 랑빌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어리둥절한 두 사람의 시선이 랑빌에게 모 였다. 랑빌이 소리를 죽이고 말을 이었다. "요사이 병사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윌이 유토나에서 파견한 첩자라는 소문인데 역시 유토나군에서 우리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일부러 퍼뜨리는 소문이라 고 생각하지만...... 나름대로 이런저런 증거랍시고 도는 말도 제법 수상쩍고 병사들의 3 할 정도는 꽤나 의혹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 것,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문이군." "그렇기는 하지만 사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하죠. 특히 전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믿 지 않는다고 해도 제법 심난해하실 겁니다." "말하지 않는 게 낫겠군." "언젠가는 귀에 들어가겠지만 조금이라도 늦추는 게 낫겠군요." -------------------------------------------------------------------------- "너 누구지?" 눈앞에는 웬 빨강머리의 미녀가 둥둥 떠 있었다. 빨강의 호사스런 갑옷과 보석으로 온 몸 을 장식하고 곱슬 거리는 길고 긴 빨강머리가 불꽃처럼 넘실거렸다. 그는 장난기 있어 뵈 는 고양이 같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윌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었다. 둥둥떠있는 사람이 이름을 묻는 황당한 상황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멀뚱하게 쳐다만 보 고 있자 그가 덥석 하고 윌의 뺨을 양손으로 쥐었다. "예뻐!" "예?" "너 정말 예쁘구나. 내가 봤던 인간 중에 가장 예뻐. 이 고운 빨강머리, 희고 고운 피부, 이 목구미도, 뼛속부터 껍질까지 몽땅 다 맘에 들어! 너 내 애인이 되라." "에? 예?" "아아 목소리도 예쁘구나. 이렇게 부드러운 테너라니, 내 애인이 되어 내 곁에서만 그 목 소리를 들려줘. 아아, 영원히 이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일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 어." "잠시, 그만해 주세요. 당신 이야말로 누구십니까?" "응? 나?" 그가 허리에 손을 얹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도도한 고양이같이 턱을 세운 채 윌을 내려 다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로드니, 에스토니아의 수호룡인 화룡 공주시다!" 2화 "아직도 못 찾았어. 무언가 소식이 없는가?" "성안에 윌과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18세가량의 빨강 머리의 미소년이란 전혀." "이젠 아라벨 밖에 남지 않았어. 어디에 있는 거냐, 윌." 지크는 초조했다. 윌이 실종된 지 석 달이 다 되어 갔다. 그렇지만 윌에 대한 소식은 아무 것도 들리지를 않았다. 수도 코앞까지 점령된 유토나 군은 이제 정말 저항할 길이 없는지 윌이 유토나에서 에스 토니아 군에 심은 첩자라는 헛소문이나 퍼뜨리고 있었다. 처음 이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런 뻔 한 거짓말을 믿는 사람이나 있단 말인가, 하고. 의외로 그런 머저리가 몇인가 있어서 나름의 제재를 가하기는 했었으나 어쨌든 황당한 일이었다. 지금도 윌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당장에라도 눈을 뜨면 윌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며 나쁜 꿈을 꾸었냐고 물어 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쭉, 계속 사모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했던 그 말이 잊혀 지지가 않았다. 그런 아이를 지키지 못 했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유토나군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의 충실한 연인을 납치해가고 첩자 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아이를 잡아 가두었다. 아라벨 궁성을 공격할 때에 윌을 인질로 삼아 해코지 할 것이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깜깜해 지는 것 같았다.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아. 절대로...... 빨리 다시 보고 싶다, 윌. 보고 싶어." 지크는 손수건에 싼 붉은 머리타래를 가만히 입술에 대었다. "전하, 포로들을 직접 심문하시겠습니까?" 마르께스의 목소리에 지크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니. 필요 없다. 내일 바로 아라벨을 침공한다. 포로 심문은 알아서 보고해 올리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지크가 초조해질수록 그 전술은 마치 예술작품처럼 더욱 더 정교해져 갔다. 유토나는 이 제 수도 아라벨을 제외한 모두가 점령되었다. 오늘의 전투에서는 유토나의 중견장수인 아 시모프 남작을 포로로 잡혔다. 지크가 직접 심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은 했으나 제법 중요 한 인물이었다. 마르께스는 지크의 막사를 나와 심문실로 갔다. 포로를 가둔 이동 감옥 옆에 간단하게 만 들어 둔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라딘칼과 랑빌, 그리고 갈색 머리의 건장하게 생 긴 중년 남성이 있었다. 마르께스는 조용히 들어가 그들 뒤에 앉았다. 아시모프 남작은 유토나의 중견장수로 아라벨 근교의 작은 남작령을 다스리고 있는, 낮 은 직위였으나 제법 유서 있는 집안의 가주였다. 중앙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4 년 쯤 전의 '비스트 백작 토벌' 이후라고 들었다. 그 후 유토나의 첩보 공작에 크게 관여하 고 있는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지금 그는 낮의 전투와 심문에 초췌해진 얼굴로 양팔 을 뒤로 묶인 채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초췌한 기가 묻어났으나 그 눈에는 여전히 고고한 무장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미 심문은 중반을 넘어서 있는 듯 했다. 마르께스는 가만히 남작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심문을 주도한 것은 라딘칼이었다. "아시모프 남작가는 꽤 오랫동안 유토나를 섬긴 가신이었다고 알고 있소. 그렇지만 그런 역사에 비해 꽤 전적도, 지위도 낮은 편이지. 그런 반면에 영민 들에 대한 입지는 매우 두 터운 편이고. 개인적으로 참 본받을 만한 영주 상이라고 생각하오만." "제국의 어린 아드님(*공작 자제를 일컬음)께 그런 말을 듣다니 영광이군." "그 뿐만이 아니지. 본받을 만한 영주 집안이자 그 중에서도 정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 친 최초의 가주가 아니오? 유토나 안에서도 지장으로 이름 높지만 그 신분이 낮다고 하여 전적에 비해 영향력은 적다, 첩보 쪽에서 하루라도 일해 본 적이 있다면 모를 리가 없는 사 안이지. 유감스럽게도, 유토나가 좀 더 에스토니아의 공세에 견딜 만큼의 국력이 있을 때 태어났었다면 백작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과찬의 말씀이군." "과찬이라니,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서로 마주보며 뼈가 있는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림같이 예의바른 미소를 보이고서 다시 남작은 표정을 굳혔다. "바라는 게 뭔가, 발루아 공작 자제이시자 투렌 백작이신 라딘칼 각하?" "협상을 좀 해보자는 거지. 유토나의 충실한 신하이기보다는 아시모프령의 믿음직한 영주 이신 아시모프 남작 님과." "......" "당신이라는 분이 적군이라는 것은 정말로 아까운 일이오, 남작. 하필이면 유토나를 멸망 시킬 만한 용장인 지크 황자가 있던 시대에 유토나 인으로 태어나 버렸으니 말이야. 조금 만 더 괜찮은 시대에 태어났었다면 유토나의 유수 귀족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 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차피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지금 유토나가 함 락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든 아라벨은 함락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란 사람 은 정말 아까워요. 그러니까 제가 제안을 하나 하죠. 하나는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당신의 아시모프 령은 어느 출신도 모르는 에스토니아 귀 족의 은행창구 중 하나가 된다." 남작은 입을 한 일자로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라딘칼에게만 시선을 맞추었다. "또 하나는 에스토니아에 투항해서 당신의 아시모프를 지킨다. 난 개인적으로 두 번째를 추천하오. 왜냐면 그것이 내가 당신을 존경하는 이유와도 직결되니까." "왜? 그런 지극히 이기적이고 치졸한 면이 당신의 마음에 들었나, 백작?" "난 당신이 군주보다도 백성을 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존경할 뿐이야. 물론 당신의 땅과 당신의 백성만을 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이어온 아시모프 령은 결코 좁은 땅이 아니지. 그런 넓은 땅과 백성들을 단 한 번도 전란에 휩싸이지 않게 한 당신의 가문을 나 는 높게 평가하오. 특히 지크 태자 전하에게서도 지켜낸 것은 말이지." "......" "어떻게 하겠는가? 아시모프 남작. 에스토니아에 투항하겠는가, 아니면 이대로 칼을 받겠 는가?" "......투항하겠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군, 당신." 라딘칼이 만면에 미소를 띄고 가볍게 손짓을 하자 랑빌이 나서서 남작의 포박을 풀었다. 뻣뻣하게 굳은 손목을 가볍게 풀고 남작은 좀 더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러면 이제 무얼 물어보겠는가?" "역시 뭔가 다르시군. 그럼 유토나 군의 첩보 부장으로 있었던 당신에게 묻지. 현재 유토 나가 에스토니아에 심은 첩자는 모두 몇이지?" "다 합해서 한 450명쯤 되지. 정확한 숫자를 알고 싶나?" 라딘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에스토니아에서 심은 첩자의 배는 넘는 숫자였 다. 에스토니아에만도 그렇게 많은 인력을 뿌리다니, 그렇게 정보가 흘러나가서야 정말 지 크 태자가 아니고서는 유토나의 함락이 불가능했었을 것이다. 라딘칼의 침묵을 긍정으로 여겼는지 남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에스토니아 궁성과 수도 제노아에 57명, 유토나 원정군에 65명, 7대 영주 가문에 34명, 주요 군기지 35곳에 176명, 주요도시 7곳에 127명해서 모두 459명." "어디까지 알고 있지?" "2급 기밀 정도까지라면 전부 다. 1급 기밀은 3할 정도. 그렇지만 정보가 이동하는 데에 도 시간이 걸리니까 제노아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한달 정도의 시간차가 있지." "그렇다면 유토나 원정군의 정보는......" "긴급한 연락은 4시간 이내에, 보통 정보라면 하루 이내에 입수된다." "그러면 에스토니아 군의 위치나 군사력 정보 같은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훤히 꿰뚫고 있었지. 그렇지만 정보 쪽에서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전선에서 제대로 뛰어주지 않으면 한계가 있으니까. 그리고 지크 태자의 전술은 정 말 다양하고 절묘했으니까, 아무리 정보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도 범재인 장수들로 는 당해낼 수가 없더군. 당신들은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할 거야." "로드니시여...... 형님이 빡 돌지 않았었다면 유토나 점령은 완전 불가능한 일이었겠군. 정보는 어떤 루트로 전해졌지?" "편지를 통해서 인편으로. 물에 갠 잉크와 기름에 갠 잉크 두 가지를 섞어서 편지를 쓴 다 음 첩자들간의 루트를 통해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인 척 해서 유토나 군으로 보내는 거지. 대강 셋에서 다섯 명 정도를 한 조로 해서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편지를 모아 보내는 척 밖 으로 보내는 거야. 그리고 도중에 반드시 쉬어 가는 역참을 지정해서 요원들끼리 편지를 바꿔치기 한다. 그런 식으로 에스토니아 군영에서 유토나 군까지는 보통 6시간이 걸린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전서구를 통해 아라벨로 보내지는데 그런 경우 24시간 이내. 그렇게 중 요하지 않은 것은 군영에서만 사용되거나 정리해서 인편으로 아라벨로 보내지는데 한 일 이주 정도 걸린다." 꽤 오랜 시간 라딘칼은 남작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유토나의 첩보작전 뿐 아니라, 유 토나의 군 사정과 각종 기밀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보가 오갔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2시 간 정도가 지나고서야 라딘칼은 겨우 질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있던 랑빌 도 펜을 내려놓았다. 투항한 남작에 대한 취조는 제법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기 때 문에 앞의 탁자에는 따뜻한 차도 놓여 있었다. 펜을 내려놓고서 잠시 찻잔을 바라보고 있던 랑빌이 이내 고개를 들고 남작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기록에 남기지 않는 채로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아시모프 남작께 서는 윌 스칼렛이라는 소년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지크 황태자의 하인이자 시동이었고, 몇 달 전부터 그 애동이 된 빨강머리의 미소년. 석달 전부터 행방이 묘연해졌고." "그 윌 스칼렛은 유토나에서 에스토니아 군에 심은 첩자였습니까?"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마르께스와 라딘칼도 놀란 눈으로 랑빌을 쳐다보았다. 남작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양손을 포개어 턱을 괴고서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이내 남작이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순식간에 마르께스와 라딘칼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이라 생 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개의치 않고 랑빌은 질 문을 계속했다. "윌 스칼렛에게서 유토나 군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입수했습니까?" "거의, 아무것도." "아무것도?" "그 아이는 본래 첩자가 될 만한 자질은 있지만 성품을 갖추지 못한 아이니까. 남의 행동 이나 주의를 잘 살피는 아이지만 그것을 남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남을 피하는데 사용하는 아이요. 윌은 유토나 군에 넣어둔 넉 달 동안 그 애가 보낸 전문은 본진을 차린 위치와 이동뿐이었지. 솔직히 그 녀석한테 제대로 된 첩보를 기대하진 않았었지만 좀 너무 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지." "윌 스칼렛의 실종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전혀. 난 윌의 철수를 명령한 적도 없고, 윌도 제대로 임무를 마치고 철수하려면 넉 달이 아니라 일 년 동안 에스토니아 군에 머물렀어야 하오. 지금 윌은 유토나 군에서도 탈영병 으로 분류되어 있어. 내 영지민 이고, 그 양부도 역시 내 영지에 있기 때문에 돌아올 것은 내 영지밖에 없는데 돌아오지 않았어. 윌은 유토나에서도 완전히 종적을 감추어 버렸소." "그 아이가 첩보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면서도 에스토니아 군에 침투시킨 이유가 뭐지 요?" "일종의 인해전술을 맞췄을 뿐. 그리고 덤으로 미인계를 조금 노렸을 뿐이오." "......성의 있는 대답, 감사합니다. 남작." "......아닙니다." 남작을 뒤에 남겨두고 나온 세 사람의 얼굴은 하나같이 흙빛으로 굳어있었다. 침묵을 깨 고서 입을 연 것은 랑빌이었다. "이 일은...... 전하께는 알리지 않기로 합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 거야." "첩자였다는 것만으로도 배신감을 느끼시겠지. 그리고 설사 첩자로 전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고 해도 유토나의 평민, 그것도 어떤 형태로든 군에 종사했던 아이를 애첩으 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 전하께 누가 될 것입니다. 힘드시겠지만 그저 모르시는 채로 잊게 내버려두도록 하는 것이 옳을 듯싶군요." ---------------------------------------------------------- 심문을 끝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밝은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마르께스는 태자의 막사 를 향했다. 약식 보고는 이미 남작의 정식 심문을 마쳤을 때 올린 채였다. 막사 안으로 들 어서자 탁한 공기가 느껴졌다. 불빛이 보이는 것은 막사 한 가운데에 지펴진 모닥불과 지 크가 앉아 있는 책상뿐이었다. 마르께스가 들어온 것을 눈치 채고도 지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지도와 보고서를 보면서 전술을 짜고 있었다. 태자의 얼굴은 몇 달 전의 화색이 돌던 얼굴과는 사뭇 달랐 다. 지난 해 투렌과 랭스 지역을 침공하던 때 전장에서 보았던 냉혹한 표정, 회색의 얼굴. "인질들을 심문해 아라벨 성에 대한 조사를 끝마쳤습니다. 최후 침공은 언제?" "내일 아침 바로 밀어붙인다. 지하통로로 나와 암격단이 이동한다. 문이 열리면 나머지 부 대도 일제 공격."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마르께스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주군의 눈이 온기도 인정도 아무것 도 비치지 않는 비정한 장군의 눈이 되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아라벨 성의 제압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피와 부서진 잔해가 흩어진 궁성 앞마당에는 유토나의 중신들이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감싸고 에스토니아의 중보병들이 사열해 있었다. 채 도끼날의 핏자국 이 마르지도 않은 형형한 눈의 군인들 뒤로 두려운 눈치로 그들을 살피고 있는 유토나의 백성들이 있었다. 살벌한 적막과 낮은 웅성거림 사이로 군악대가 팡파르를 울렸다. 경쾌하여야 할 그 곡이 유토나 인들에게는 마치 장송곡처럼 들렸다. 그 가운데서 적국의 태자가 걸어 나왔다. 측근들에 보호받는 감싸인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들을 뒤에 대동하기만 한 채, 아직 그 검은 갑주에 마르지 않은 유토나 인의 피를 흘리면 서 귀신같은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투구를 벗어 종자에게 건넨 그 얼굴에는 생채기 하나, 멍 자국 하나도, 한 점의 피로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저 한명의 사람일 뿐이었는데도, 유토 나 인들은 그 황자가 한 마리의 거대한 맹수같이 느껴졌다. 궁성을 감싸고 호위하고 있는 에스토니아 군이 자신들의 황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유토나 인을 흉포한 황 자에게서 보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찾았나?" "어디에도 붉은 머리의 18살 내외의 청년은 없었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지크가 한 물음에 우렁찬 목소리로 병사가 답했다. 지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 보루였다. 아라벨 성까지 점령한다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윌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윌을 못 볼 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니 심장이 창으로 찌른 듯 쑤시고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아직 유토나의 잔당이 남아있다. 그 놈들이 인질로 끌고 갔을 수도 있어. 찾을 수 있어. 찾을 수 있다고. 윌, 기다려줘. 네가 어디에 있더라고 내가 꼭 찾아서 구해줄 테니 까.' 다시 다짐을 하면서 지크는 유토나의 잔당이 남아 있는 곳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짚어가 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죽어!!!" "전하! 피하십시오!!" 안뜰 뒤쪽의 그늘진 곳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크게 휘둘러진 칼은 그 솜씨도 위력도 매우 날카로웠다. 그러나 대륙 최고의 용장(勇壯)이라는 지크프리드 황자를 베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검날에 베어진 것은 밤바다처럼 새까만 망토자락 뿐, 채 그 검을 수습하기도 전에 지크가 휘두른 칼에 자객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가슴과 어깨를 길고 깊게 베인 자객은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쓰러졌다. 온몸을 푸들푸들 떨면서도 그자는 지크의 옷자락을 사력을 다해 잡고 기어올랐다. 지크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자객은 폐까지 찔렸는지 입에서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나이 는 중년 정도, 제법 몸이 좋은 이였으나 눈이 본래 잘 보이지 않는지 생명이 꺼지면서 흐려 지는 눈빛과는 달리 초점이 흔들리는 눈을 전력을 다해 부릅뜨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멱 살을 잡은 지크의 소매를 움켜쥐고 피와 함께 절규를 토해냈다. "난....... 네놈이 농락하고 죽인...... 윌 스칼렛의 아비다. 내가 죽어도 우리...... 유토나 인의 원한은......" 지크는 순간 눈앞이 까매지는 것을 느꼈다. 그자를 얼굴 앞까지 끌어당겨 윽박질렀다. "뭐라고 했어!!" 그러나 그의 생명의 불은 이미 다 꺼지고 온기만 남은 재였을 뿐이었다. 흐려져 가는 목소 리로 그는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윌...... 네 원수를...... 갚지 못 했어. 내 아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 그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크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주위에 몰려와 있던 이들이 혹시 모른 새에 그 자객이 암 기라도 쓴 것이었나 하고 놀라서 달려와 붙었다. 자객을 떼어내고 지크를 부축하며 물은 것은 마르께스였다. "전하!" "아...... 아......." 그 검은 눈에서 강줄기처럼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르께스는 입을 다물고 시체를 치우고 사람을 물리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도 그 자객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3화 "안됩니다." "왜?" "사모하는 분이 있습니다." "겨우 인간과 나를 비교하는 거냐? 네가 사모하는 년보다 내가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 냐?"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안 돼?" "사모한다는 것은 유일하다는 것이니까요. 못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입니다." "억지야." "로드니 님 만큼은 아닙니다." "괜히 내 핑계를 대는군." "본래 비논리적인 사랑을 순위를 매기라 하시니 그런 겁니다." 매일이 이런 대화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로드니를 그런 지지부진한 대화를 즐기는 듯 했 다. 수시 때때로 어디선가 나타나서 시시한 대화를 하며 윌을 지분거리는 것이었다. 제법 여유 있는 모습이 처음 만났을 때의 다짜고짜 덤벼들던 모습과 많이 달라 윌은 오히려 놀 랐다. 자신을 괜히 집적거리는 것만 제외하고는 로드니는 제법 좋은 사람, 아니 좋은 용이었다. 밝고 쾌활하며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에스토니아의 수호룡이 되었던 것도 수백 년 전 그 초대왕이 퍽이나 미남자였기 때문이었다고 넉살좋게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루하고 긴 삶에 자극제가 될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아? 이 름만 빌려주고 100년에 한번쯤 얼굴만 보여주는 것만으로 얼마나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 을 할 수 있는데." 로드니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모습은 실로 그 주위로 불꽃이 가루가 되어 날리는 듯이 빛나 보였기에, 호감이 가는 모습이기는 했으나 그 호감을 보이면 그 즉시 "이제 내 게 마음이 돌아섰냐?"며 또다시 지분대기 시작하므로 윌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 다. 일 년에 세 번 신관이 신성한 불을 가지러 오고, 한 달에 두 번 호사스런 제물을 바치는 것 을 제외하고는 외부인의 출입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딱히 금역인 것은 아니었으나 누구 도 오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깨끗하고 엄숙하 지 않으면 안 된다. 본의 아니게 할 일이 많은 곳인 것이다. 신전과 그 길, 정원을 청소하 고 잡초가 생기지 않게 관리한다. 제단을 관리하는 것도 윌의 몫이다. 양초, 꽃 장식, 보석 등을 걸맞게 치장하고 관례대로 오는 제물을 관리한다. 그 제물 중 특색이 있는 것이라면 무도회의 초대장이었는데, 고풍 스런 글씨로 "화룡공주 로드니 전하"라고 적혀있는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에스토니아 초 대 황제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라 했다. 에스토니아의 수호룡이 화룡공주라 하는 이야기는 제법 유명한 일이었던 듯하며, 화려하 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성품으로 무도회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특히 수도인 제노아에서라면 어지간한 지위 이상의 가문이라면 화룡공주에게 초대장을 보 내야 하는 것이 관례이며, 그 행위가 무도회의 격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한 사적인 것이 아 닌 공식적인 무도회임을 밝히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드니는 그 초대 장의 수를 세면서 스스로를 제법이나 자랑스러워했는데 그 것이 마치 자아도취에 빠진 16 살 소녀같이 느껴져 윌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는 것같이 지낸 것이 한 달이었다. 아무도 없는 화룡정에서 로드니의 존재는 윌에게 얼마 없는 즐거움이었다.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제법이 나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수군수군 거리던 제노아가 열광에 빠진 그 날이. 그 날, 오색의 기를 매고 파발이 제노아로 뛰쳐 들어왔다. 아직 채 새벽의 어스름이 남아 있었는데도 시가지는 묘하게도 들뜬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남쪽의 대로를 가로질러 기사 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대로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물러섰다. 기사는 성문 앞에서 사람들을 향해 기운차게 깃발을 흔들어보였다. 모여있던 군중들은 제노아가 들썩 거리도록 거대한 환호성을 질렀다. 그날이 바로 유토나의 왕성인 아라벨이 함락된 날이었다. 윌은 유난히 들떠있었다. 인간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로드니가 보기에도 확연했다. 어떤 일에도 인간답지 않게 침착했던 윌이 눈 오는 날 강아지같이 들떠있었다. 왠지 귀여워 보 이기도 해서 그냥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년이구나. "그년이냐?" "네?" "그 년인지 놈인지가 유토나 정벌군에 있었던 거군. 감히 내가 맘에 든 것에 먼저 손을 뻗 친 천것이. 네가 유난히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길래 그냥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건가 했는 데. 어느 년이냐." "로드니?" "어느 년이야! 아니 놈이냐? 네가 아직도 못 잊어 하는 그 놈이 어떤 놈이냔 말이야?" "왜?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어서......" "내가 점찍은 것에 손을 뻗친 놈이니까.......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며 로드니는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웃고 있었다. 온몸에서 타오르는 듯 한 열 기가 뿜어져 나오고 머리칼이 불꽃같이 일렁였다. "그, 분에게 해를, 끼치려고?" "시험을 좀 해보겠다는 것뿐이지." "안, 돼." 윌은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아직 소년을 벗어나지 못한 몸은 부들부들 떨렸고, 뻣뻣 하게 굳은 성대는 말을 채 자연스럽게 잇지도 못했다. "안, 돼.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내가, 왜, 그분을 떠났는데. 그 것 만으로는, 부 족한가?" "윌?" "사랑해 주길, 바라지 못했어. 바라, 보는 것도 바랄 수, 없었어. 가까이 있는 것, 도 할 수 없었는데." "윌? 너 식은땀이......" "그저 멀리서, 바라 볼 수라도 있다면, 좋아서. 같은 시간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견 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윌. 그만해! 그만!" "그것도 할 수 없어. 안 돼. 안 돼는 거야." 윌의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리고 입술은 보라색이 되어서,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릎에 힘이 빠지는 듯 천천히 주저앉자 로드니 가 놀라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 "같은 시간 안, 에 사는 것만으로 만족 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 것, 만으로도 폐가 되는 건 가? 곁에 있을 수, 없어. 살아 있을 수도 없어. 허락받지, 못했어. 차라리 죽어, 버릴까?" "히익! 윌! 안돼! 죽으면 안돼! 이 멍청이." 동공이 크게 확장되고 숨을 쌕쌕 몰아쉬기 시작하자 로드니가 놀라서 윌을 바닥에 눕히 고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마법은 좀체 먹히지가 않는지 동공은 커졌다 작아졌다 를 반복했고 바들거리는 손의 떨림 도 멈추지를 않았다. "제기랄"하는 한 마디를 씹어 뱉은 후 로드니는 즉시 마법을 바꾸어 윌을 재워버렸다. 잠시 눈을 흡 뜨는가 싶던 윌이 바닥에 널브러지자 그제야 로드니는 안 도의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멍청이,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 인거야."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로드니는 한 손으로 윌의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려 주었 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잠이든 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 어?" 그리고는 쏟아지기 시작한 고장 난 수도꼭지 마냥 쉬지도 않고 흘러내리기만 했다. 무언 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뻐끔거리면서, 마치 악몽에 시달리는 듯 울고 있었다. 로드니는 잠 시 난감한 표정을 짖다가 이내 윌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았다. 이내 로드니의 몸에 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떠지지 않는 눈을 애써 뜨자 눈가로 무엇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 다. 잠시 눈을 깜박거리고 있자 누군가가 옆에서 손을 잡아왔다. 윌이 누운 채 고개를 돌리 자 로드니가 눈에 들어왔다. "로드니?" "윌....... 윌....... 이 바보 자식......" 그런 말을 하더니 눈에서 눈물을 줄줄 쏟기 시작했다. 로드니의 붉은 눈동자가 눈물로 가 득 차는가 싶더니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윌은 당황해 몸을 일으키고는 소매 로 뺨을 그득 적시는 눈물을 닦으려 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채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이, 끄윽, 바보야, 흑. 네 뒷수습이나, 흐윽, 잘 하란, 윽, 말이야." 끅끅거리면서 로드니가 손바닥으로 거칠게 윌의 눈가를 닦아냈다. "왜, 네 속은 그렇게, 흑, 텅 비어 있는 거야. 흐윽, 텅 비어서는, 으윽, 그 놈밖에 없었어. 세상에 그, 끄윽, 놈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 잘, 흐윽, 해주는 아버지도 있으면서, 흐윽, 왜 그런 놈한테 네 인생, 흐윽, 다 갖다 바치냐구. 이 바보야." 우느라 꺽꺽 거리면서 로드니가 말했다. 윌은 로드니의 뺨에 가 있던 손을 무릎 위로 내렸 다. "난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응?" "난, 원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녀석이니까. 죽지 못해 살았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채 살았으니까 당연히 텅 비었을 뿐. 당신이 나의 무엇을 봤는지는 모르겠 지만 난 본래 그저 혼이 빈껍데기일 뿐 이예요." "아냐, 아니란 말야. 넌 착해. 소중한 사람이야." "왜? 당신도 내 껍데기를 보고 반했잖아. 이게 아니고는 난 그냥 다 컸어도 아무 것도 잘 하는 게 없는 버러지일 뿐이라고. 내 껍데기를 제외하고 과연 가치를 가진 것이 있던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 난 당신같이 강하지도, 명민하지도, 올곧지도 않아. 그저 예쁘장 한 껍데기를 가진 약한 인간에 불과해요." "아냐, 아냐. 넌." "그러니까, 약한 녀석이 바란다 는 것의 달콤함을 아는 것은 사치야. 그걸 알고 있으면서 도 평생에 단 한 가지를 바랬어. 하지만 이제는 생각조차 할 자격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 을 뿐이야." "아냐, 사치가 아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바보야." "그분이 없이는, 살아있을 의미가 없어." "윌......." "그분이 살아계시니까 언젠가는 다시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어. 그 소 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뻤어. 멀리서라도, 그림으로라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것만 으로도 행복하니까 그래서 살아있었어. 하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분에게 폐가 된다면 더는 살아있을 수 없어." 윌은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눈물이 떨어져 얼룩이 졌다. 로드니는 양 손을 윌의 뺨에 감 싸고 눈을 마주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윌." 가슴이 아팠다. 잠든 이 녀석의 꿈을 봤다. 과거를 봤다. 이 아이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의 행복했던 순간들. 그리고 메말라있던 감정을. 그리고 그제서야 이 아이가 했던 유일의 의 미를 이해했다. "좋아해, 어린 윌. 너는 버러지 따위가 아냐. 깨끗하고 아름답고 착한 아이. 미안해, 너에 게 불가능한 일을 강요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로드니는 윌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로의 작은 어깨를 보 듬어 안고 두 사람은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로드니는 윌에게 자신의 애인이 되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보다 훨씬 자주 윌의 곁에 붙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윌은 생애 두 번째로 가족 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로 부터도 보름가량이 지났다. 제노아는 전에 없이 활기가 넘쳤다. 온 도시가 활기에 넘쳐 북적거리고 있었다. 대로에 노점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가계들은 창문마다 꽃을 장식 했다. 그리고 제노아의 외성곽 남문이 열리며 그들이 들어섰을 때, 주민들은 환호성을 지 르며 꽃잎을 하늘 높이 뿌렸다. 지크프리드 황태자의 유토나 정벌군이 개선하고 있었다. 황자는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제노아 성으로 향했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지크 의 이름을 연호했다. 환호하는 군중들을 지나 황자는 제노아성에 당도했다. 황제와 황후 가 직접 나와 그들의 장남을 맞이했다. 격식 따위는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황제는 선뜻 앞 으로 걸어 나와 말에서 내린 황자를 품안 가득히 안았다. 유난히 정겨운 가족들의 포옹을 받고 지크는 황제와 황후를 따라 단상위로 올라섰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황제가 앞에 나 서 연설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에스토니아 인들이여. 우리의 로드니가 항상 우리를 굽어 살피기를. 이로 써 우리 에스토니아는 대륙 최고의 제국이 되었다!" 환호성이 우레와 같이 제노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주역은 바로 짐의 후계자이자 에스토니아의 황태자인 지크프리드였다. 그리하여 짐 은 선언한다. 내일부터 황자비를 간택하는 무도회를 사흘간 열 것이다. 그리고 그 비와 결 혼하면 이후, 나는 태자에게 양위를 할 것이다." 모여 있던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후가 그의 뒤로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태자는 명민하고 자애심이 깊으며 용맹하다. 또한 침착하고 좋은 군주가 될 자질을 갖추 고 있지. 그런 이상 내가 빨리 물러나는 것이 옳을 듯싶었다. 이미 각 국에 신부후보를 보 내왔다." 황제는 자신의 장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 아들을 믿으니 혼인을 하건 안하건 너에게 양위를 할 터이지만, 너도 나와 같이 사랑하는 인생의 반려를 얻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비의 손을 굳게 쥐었다 그런 바깥의 활기와는 달리 조용한 곳이 있었다. 황궁에서도 구석진 곳에 뚝 떨어져 있는 화룡정, 그 곳은 바깥의 왁자지껄한 축제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언제나와 같이 적막했 다. 슬슬 길을 쓸어내고 있는 윌의 뒤로 로드니가 다가갔다. "가보지 않아? 보고 싶잖아." 단정적으로 말했다. 항상 혼자 있을 때는 목에 건 주머니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 고 그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로드니가 모를 리 없다. "가면 안 됩니다." 가지 않는다, 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뒷모습을 보자 로드니는 가슴이 아렸다. 그 주머 니 안에 든 것은 놋쇠로 된 인장반지, 그리고 까만색의 머리타래 하나뿐이었다. 그 머리타 래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리던 것을 로드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앞으로 사흘간 무도회가 열린데. 나에게도 초청장이 왔어." 진주색의 카드를 들어 보이며 로드니가 말했다. "태자비를 간택하는 무도회랬어. 그가 너를 찾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이 무도회가 지나 고 나면 너를 영영 잊어버릴지도 모르는데, 보러가지 않아?" 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로드니는 재차 윌에게 권했다. "보러가. 언제까지 그렇게 추억만 되새김질하면서 살 거야. 한번 얼굴이라도 보면 훨씬 행 복할 거 아냐. 너에겐 그 사람밖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괜찮아요. 그냥 추억할 수 있는 것 만 으로도 충분해." "바보야, 사람은 추억만으로는 살 수 없어." "괜찮아요. 그 추억이 다하기 전에 난 죽을 테니까." 로드니가 멍하게 멈춰 섰다. 그런 로드니를 보고 윌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길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로드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입술을 꽉 깨물자 눈에서 눈물이 그렁하게 맺혀버렸다. 하지만 분노한 것은 아니다. 뭔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가슴이 아팠다. "안돼." "로드니?" "내가 널 왜 포기했는데! 널 좋아하니까,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서 포기한 거야. 그런데 네 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로드니!" "같이 가! 같이 가서 그를 봐. 그에게 사랑한다고 한마디라도 해. 단 한번이라도 그를 사랑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너라고 말하란 말야." "할 수 없어요. 난 못해." "그의 기억에 남는 것이 무섭나?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너를 보고 그를 해할까봐 무 서워? 항상 그랬었으니까?" "네, 무서워요. 난 항상 그에게 폐만 될 뿐인 걸." "몰라, 난 그런 건 몰라. 나에게 중요한 것은 너 뿐이야. 네가 행복해지면 그걸로 족하다 고. 내가 해 줄게. 내가 너의 추억을 만들어줄게. 오랫동안 살 수 있을만한 추억을. 단 하루 만이라도 다시 그의 연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게. 너를 무도회에 데리고 나갈 거야. 그럴 테니까 그와의 추억을 만들어. 그러면...... 내가 그와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줄게. 아 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아무도 네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누구도 너를, 너의 사랑을 해하지 못하게 내가 기억을 지워줄게. 그러면 너는 너만의 추억을 갖고 좀 더 오래 행복해 질 수 있겠지." 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고 싶지? 만나고 싶지? 다시 한 번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잖아.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줄게." 그 달콤한 유혹에 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4화 지평선 위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자, 화룡정 서쪽으로 보이 는 본궁의 불빛이 더욱 찬란해졌다. 수많은 촛불이 보석처럼 밝힌 빛이 흰 대리석의 건물 에 비쳐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멍하게 서쪽을 주시하고 있자 이내 청년의 옆으로 한 사람이 내려왔다. 윌은 시선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 가볍게 땅에 발을 디딘 로드니의 손에는 호사스런 장식의 상자가 들 려 있었다. "어울릴 거야." 윌은 가만히 그 상자를 받아들었다. 금장을 넣었지만 재질은 종이 같은 것이었는지 별로 무겁지 않았다. "걱정 마. 너에게 최고의 꿈을 꾸게 해 줄게." 무도회장은 모래밭에 흩뿌려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모래, 깨어 진 유리, 그리고 조각난 다이아몬드가 뒤섞인 뜨거운 밤의 열사. 유리의 샹들리에와 금박 이 휘황찬란한 촛불에 비쳐 만화경처럼 반짝였다. 그 아래서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새하얀 백분을 바르고 색색의 비단을 두르고 서로서로 똑같이 웃는 얼굴을 하고 조잘거리고 있는 모습은 흡사 공작을 닮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지크의 눈에는 어느새 무도회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새의 얼 굴같이 보였다. 그들이 하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같이 들릴 뿐. 눈앞에 벌어지는 향연도 전혀 실제감이 없었다. 모두가 마치 호수 바닥에서 일어나는 일인것 마냥 흐느적흐느적 거리고 있다. 사람들의 모습도 파문이 이는 물그림자 마냥 일그 러져 보인다. 그게 왜 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옛날에 얽매어있다. 그 과거 의 매듭을 풀 생각도 전혀 하지 않은 채. 아마도 그 과거의 잔재라도 나타난다면 주저 없 이 손을 뻗을 것이었다. 설사 그 것이 스틱스 강 너머서 뻗은 손이라고 해도 전혀 주저하 지 않고. 그의 아름다운 작은 새는 이미 죽었다. 새가 자신의 시신을 결코 보이지 않듯이 그렇게 자 신에게는 그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죽어버렸다. 자신이 소년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 그 남자는 스스로를 내가 농락하고 죽인 윌의 아비라 했다. 그에게는 정말 붉은 머리의 윌 이란 양자가 있었다. 놀랍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아들이라 했다. 자신은 그런 그를 죽이고 그의 아비까지 죽이고 그의 조국도 짓밟았다. 그래서 그 머리타래만 남기고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은 거였을까. 과연 나의 윌은 사람이었을까. 지크는 생각했다. 새벽의 요정 이라든가 유니콘 같은 게 아 니었을까. 본래 순결하게 존재했어야 했던 그를 자신이 더럽혀서 그렇게 사라져버린 게 아 니었을까. 이슬이 새벽빛에 스러져버리듯이 흔적도 없이. 윌이 첩자였다는 것을 안 것은 전혀 충격이 아니었다. 그렇다 기보단 어차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요정 같은 이가 그렇게 지극히 세속적인 일에 발을 들였을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첩자란 그의 상황과 위치일 뿐. 언제나 뜬 구름처럼 조용하고 고요한 이였으니까. 오히려 충격적인 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 뿐. 이제 어디에서도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것 뿐. 새가 창가에 깃 하나를 떨어뜨려 둔 듯이 남겨둔 머리타래 하나가 전부라는 것 뿐. 그게 전 부였다.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태자는 아직 조그마한 막내 여동생의 손을 잡았다. 모두가 둘러선 가운데에 짧은 왈츠를 추고 다시 황자는 자리에 앉았다. 이내 사람들이 모여들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꽃송이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결혼 적령기의 처녀들이 한명씩 줄을 지어 태자에게 절을 했다. 에스토니아의 영애들도 타국의 공녀들도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 이 꽃 같은 미녀였다. 지크는 예의를 갖춰 그들에게 답했다. 어차피 그가 아니면 누구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자 신이 고르지 않아도 어느 새엔가 추려진 신부후보가 나타날 테고, 채 누구인지 구별하기 도 전에 어느 샌가 정해져 있을 터. 아직 사흘이나 남아있는 채, 아직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지크는 되 뇌이며 손아귀를 꽉 쥐었다. 손바닥을 따끔하게 찌르는 느낌, 반지였다. 지난 밤, 모친인 황후가 지크의 손에 쥐어줬던 반지였다. "지크, 폐하는 엄마에게 청혼할 때 이걸 끼워주었어요. 대대로 내려온 거랍니다. 오래 전 부터 왕가에 내려온 반지래요. 모친이 황자에게 건네주면서 청혼을 하고 오세요, 하는 거 죠. 폐하는 이걸 들고서 한 번에 엄마를 알아봤다고 했으니까, 지크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환하게 웃으며 다이아몬드가 꽃처럼 박혀있는 반지를 쥐어주는 모친을 보며 지크는 그저 씁쓸하게 웃어보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멍하게 앉아있었을 때였다. 멀리, 문 쪽에서부터 묘한 파문이 퍼져왔다. 마치 홍해를 가르듯이 사람들의 바다를 가르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불 같이 빨간 머리의 두 사람. 스물 남짓한 호사스런 차림의 미녀, 그리고 십대 후반 정도로나 보이는 미소년. 연상의 그녀가 어린 연인을 에스코트해 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도 대단한 미인으로 자신 만만한 붉은 눈동자를 도도하게 치켜뜨고 루비를 녹여 만든 듯 한 농염한 붉은 색의 풍성 한 드레스를 입고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의 눈을 멈추게 한 것은 그 미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에스코트 하듯이 데리고 온 소년. 바로 그였다. 태양에 비춘 루비처럼 맑은 빨강머리, 부서질 듯 파란 초록색 눈동 자, 아름다운 얼굴. 그는 어느 때의 유행인지 어느 지방의 의상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흰 예 복을 입고 있었다. 푸른 기장을 달고 금빛의 선을 댄, 요즘의 유행같이 덕지덕지 붙인 것 이 아닌 아주 간결하고 직선적인 옷. 목까지 채워진 금욕적인 모습. 무엇하나 이곳에 모인 이들과 같은 것이 없는 모습. 지크가 생각했던 것처럼 인간이 아니라고 얘기해주는 듯이 인간의 무리에 전혀 녹아들지 않는 여전히 순결하고 아름다운 천사. 혼재된 유리조각 사이 에서 혼자서 빛나고 있는 다이아몬드. 그들이 홀의 가운데까지 왔을 때에는 모두가 그들의 앞에서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지상 의 것이 아니라는 듯 한 미모. 감히 그 앞에 서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 도도한 여자의 눈에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실로 놀라운 것은 그 소년. 그 여자도 대단한 미녀였지만 그 소년은 그것을 뛰어넘는 미인이었 다. 여성스럽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실로 싱그럽고 사랑스러운 미모. 심장이 녹아내 리는 것 같아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악사는 연주하는 것을 잊었고, 사람들은 춤을 추는 것을 잊었다. 손님도 급사도 하인도 누 구하나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심지어 황제도 황후도, 대 신도 장군도 누구하나 할 것 없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 다. 그렇게 멈춰버린 순간을 깨고 황자가 일어섰다. 그제야 모두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 았다. 황자는 날듯이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그 가운데로 황자가 성 큼성큼 내려갔다. 아직 어린 소년을 보호하듯이 여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년을 감쌌다. 황자가 잠시 멈 춰 섰다가 정중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허리를 숙이고 정중하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도도하게 든 턱을 내리지도 않은 채 황자의 인사를 받았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서 황자는 몸을 돌려 소년을 향했다. 그렇게 빤히 소년을 바라보고 있자, 소년을 보호하듯 이 막아서고 있던 여자도 이내 옆으로 물러섰다. 소년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것만으로 주위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처음으로 인간 세상에 나온 요정 같은 모습이어서 무장인 황자와 마주하고 있는 것조차 안쓰러울 정 도였다. 황자가 손을 내밀었다. 여느 남자에게나 하듯이 악수하는 모양으로 손바닥을 옆으 로 세워서. 소년은 주저하는 듯이 손을 내밀어 황자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러자 황자가 소년의 손을 잡은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 절해 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황자가 소년의 손등에 공손하게 입을 맞추었다. "진홍의 윌(Will of Scarlet), 부디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모두가 놀라서 숨을 멈췄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그 소 년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려버렸다. 온 뺨과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 유리구 슬 같은 눈물을 똑똑 흘리고 있었다. 황자가 당황한 듯이 그런 소년을 올려보았다. 잠시 어 쩔 줄 모르고 바라보고 있는가 싶더니 다시 굳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와 결혼해 줘! 윌!!" 그 말에 무너지듯이 소년이 무릎을 꿇으며 황자의 품에 안겼다. "아....... 아....... 지크!" 황자는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런 소년을 품안 가득히 안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떨떨해 있던 사람들이 이내 정신을 차려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황자가 아름다운 요정에게 청혼을 했다, 그리고 그 요정은 날개를 버리고 황자의 아내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진심을 담아 위대한 용 자와 아름다운 요정의 사랑을 칭송했다. 무도회가 중반에 들어섰다. 모두에게 해야 할 만 한 인사는 했다. 무도회장을 뒤로 하고 정원을 향했다. 다른 무도회 같았으면 밀회를 즐기는 연인들로 가득했을 정원이었으나 홀 뒤쪽의 정자와 함께 만들어진 작은 정원은 그 누구하나 범접하지 않은 채였다. 황족의 혼 례를 주관하는 무도회일 때에는 으레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그 정원에서 밀회를 즐기는 것은 황자와 그 연인 단 둘이었다. 등롱의 불빛과 달빛 에 섞여 분수는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황자는 상의를 벗어 분수의 테를 두른 대리석 위 에 깔고 윌을 앉혔다. 그리고 다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죽은 줄만 알았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어." "지크......" 윌의 눈이 안쓰럽게 일그러졌다. 지크가 윌의 손을 쥐고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않아. 아, 아참."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지크가 주머니를 뒤졌다. 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고만 있 자 지크가 이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윌, 왼손을." 윌이 말끄러미 손을 내밀자 지크가 그 손가락을 펴고 반지를 끼웠다. 원래는 여성용이었 는지 열여덟이나 된 윌의 손가락에는 작아서 새끼손가락에 끼워졌다. 손을 들어 반지를 바 라보고 있자 지크가 말했다. "에스토니아의 황자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할 때 대대손손 썼다는 반지다. 난 너를 제 외하고 누구에게도 그 것을 줄 수 없어. 그건 네 거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윌이 눈물을 흘렸다. 지크가 그 눈물을 입술로 닦아 주었다. "벙어리가 되었니? 아니면 내가 너무 억지를 부리는 건가?" "아... 아닙니다!" "아, 미안. 그냥 너무 말이 없길래 한번 해 본 소리였어." 그 말을 듣자 윌이 당황한 듯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귀와 뒷덜미까지 발갛게 되어 버 린 것을 보고는 지크가 윌을 끌어서 품에 안았다. "비록 말이 없어도 아직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도 되지? 내가 착각하는 것은 아 니지?" 지크의 말에 가만히 안겨있는 듯 했던 윌이 바르작거리며 가슴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고 개를 지크의 옷자락에 푹 파묻어버린 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윌이 대답했다. "......예, 여전히." "정말? 기뻐!" 어린애같이 기뻐하며 지크가 윌의 얼굴을 들어 입술을 부벼댔다. 놀라서 윌이 몸을 뒤로 빼자 잠깐 멈췄다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참......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신사라면 아직 피앙세에게 손을 대면 안 되는 건가?" "푸훗!!" 결국에는 윌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지크가 볼멘 목소리로 중얼 거린다. "뭐야, 남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거라고. 지금 내가 한 말이 얼마나 많은 인내심을 필요 로 했는지 알아?" "이미 저질러 버렸었는데 지금 와서 미루네 마네 할 일이 아니잖아요." "아, 그런가......" 말꼬리가 흐려진 까닭은 윌의 흐려지는 목소리를 덮으며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몇 번인 가 깊게 혀를 얽어가며 입을 맞추고서 입술을 떼자 발갛게 물이 오른 입술이 보인다. "아직 결혼 안한 피앙세를 안는 것은 신사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추운 야외에서 피앙세를 안는 것은 확실히 신사의 도리를 벗어나는 일이겠지?" 지크는 그렇게 말하고 윌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촙,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일어섰다. "지름길로 가자, 괜찮지?" 윌이 그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가 손을 홱 잡아 당겨 윌의 어깨를 안고서 귓 가에 속삭였다. "빨리 가자, 못 참겠어." 지크의 다리 사이가 확연히 부풀어 오른 것을 보고 윌은 희미하게 귓가를 붉히며 지크를 손을 잡았다. 정신없이 그 하얀 얼굴에 키스를 했다. 이마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를 쓸어 올리고 눈두덩 에도 코에도 뺨과 턱까지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아랫입술을 약간 아프게 깨물자 윌 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드러난 귀에 입술을 대고 잘근잘근 씹고 안으로 혀를 집 어 넣었다. 바르작거리며 밀어내어 일단 입술을 떼고 내려다본다. 빨개진 얼굴로 숨을 할딱거리면서 한 손으로 귀를 가리고 있다. 하얀 시트 위에 옷도 벗 지 않고 눕혀진 모습이, 자신의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며 누워있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 웠다. 지크는 무릎을 세우고 몸을 일으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열려진 창으로 들어온 달빛 에 지크의 탄탄한 몸이 비쳐졌다. 주렁주렁 걸린 달걀만한 에메랄드의 목걸이를 풀고, 검고 두터운 예복을 벗고 튜닉까지 벗어던지자 얇은 셔츠에 달빛이 비쳐 몸의 실루엣이 확연히 드러났다. 남자라도 반할 수 밖에 없을만한 멋진 몸매였다. 지크가 목에 매어진 실크 깃을 신경질적으로 풀어내려고 하 자 그 손에 가늘고 우아한 손가락이 와 닿았다. 멍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윌이 하나하나 단추를 풀어간다. 확 끓어오르는 느낌에 윌을 쓰 러뜨려 눕히려고 하자 윌이 한손으로 지크를 저지했다. 그리고는 단추를 모두 풀고 지크 의 겨드랑이 안쪽으로 손을 넣어 셔츠를 벗겨냈다. 그리고는 지크를 밀어서 침대에 넘어뜨 리고 그 허벅지 위에 앉아서 한 벌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지크가 손을 뻗어 끌어당겨 안으려고 해도 심술 맞게 그 손을 쳐내면서 윌이 한 벌, 한 벌 옷을 벗었다. 마지막 한 벌까지 벗어내고 알몸으로 지크의 허벅지 위에 앉자 지크가 못 견 디겠는지 두 손을 뻗는다. 그러나 그 두 손은 허공을 껴안았다. 어느새 윌이 몸을 숙여 지크의 허리끈을 푸르고 있었다. 속옷과 함께 바지를 한 번에 내려 버리고는 윌이 지크의 페니스를 입에 담았다. "히익! 윌!!" 지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자 타액이 묻은 페니스가 윌의 입에서 빠져나갔다. 지크의 페니스에서 윌의 입까지 은색의 실로 긴 다리가 놓여졌다. 아마도 윌이 옷을 벗기 시작한 때부터 한창 흥분해 있었을 페니스가 주책없이 또 불끈하고 솟아오른다. 지크가 얼굴을 붉히고 있자 윌이 다시 자세를 고쳐서 지크의 것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할 짝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침대 안에 가득하게 퍼졌다. 아연실색했던 지크도 절로 억누른 신 음소릴 내기 시작했다. 윌이 입안 가득히 지크의 것을 빨아들이자 절로 엉덩이가 들썩거리 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읏, 아.... 음...... 그만. 그만, 윌......" 윌이 아랑곳 하지 않고 목구멍까지 깊게 지크의 것을 힘주어 빨아들이자 결국에는 지크 도 참지 못했다. 윌의 머리채를 잡고 그 입안에다 사정을 해 버렸다. "콜록! 큭! 콜록!" "괘, 괜찮아?!" 지크가 당황해서 물었다. 아마도 목안에 쏘아져 나온 정액이 괴로웠는지 윌이 몇 번이나 기침을 했다. 사정을 하던 중에 빠져 나온 덕에 윌의 입에서도 정액이 흘러나오고 얼굴에 도 그것이 흩어져 있다. "미안, 정말 미안. 참지 못했어." 지크가 당황하며 시트를 집어다가 얼굴을 문질러 닦아준다. 잠시 얌전히 지크가 닦아주 는 것을 받고만 있던 윌이 눈을 똑바로 들어 지크를 쳐다보았다. 괜히 민망해져서 지크가 고개를 돌리자 윌이 지크의 얼굴을 양 손으로 잡고 입을 맞추었다. "내가 밝히는 건 싫어요?" 지크의 다리에 살짝 비벼오는 윌의 그것은 18살의 사내답게 뜨겁게 서 있었다. 지크는 웃 으며 윌의 입술에 호응을 하며 파고드는 혀에 마주 혀를 얽었다. 허리를 안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슬쩍 들이밀자 빡빡하게 들어 가지가 않는다. 새삼 저번에 등잔기름을 손에 발랐던 것이 생각났다. 윌의 입에서 입술을 떼고 목덜미에 이를 대면서 보자 너른 침대 위를 굴러다니면서 가쪽까지 온 모양이었다. 손이 닿을 만한 위치에 협탁이 있었다. 한 손으로 윌을 애무하면서 한 손을 협탁으로 뻗자 뭐가 금새 손에 닿았다. 쓸 만한 것인가 하고 일단 채어서 가져오니 놀랍게도 유병, 그것도 백합향이 나는 향유가 들어있다. 내가 이런 것을 침실에 갖다 놓을 일이 있었나 잠시 당황하던 지크가 생각을 고 쳐먹었다. 그 눈치 빠른 시종이라면 얼마든지 챙겨다 놓았을 것이다. 지크는 다시 윌의 목으로 입술을 묻고 손에 향유를 부었다. 향유를 바른 손가락으로 다시 입구를 누르니 이번에는 조금 저항이 있어도 미끄러져 들어간다. 윌이 끙, 하고 앓는 소리 를 내자 한 손으로는 입구를 공략하고 또 한손으로는 가슴을 문지르며 유두를 지분거렸 다. 입술을 내려서 손가락과 같이 양쪽 유두를 지분거리며 몸을 비비자 학,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그 틈을 타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아래를 풀었다. 목과 가슴을 핥고 빨고 이 를 세우면서 등과 허리를 지분대고, 그 틈에 손가락을 늘렸다. 서로 와 닿는 고간이 아직 화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충분히 풀어졌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손가락을 뺐다. 윌이 흐려진 눈으로 지크를 올려다보 았다. 눈 안에 아직 열기가 남아있다. 지크는 웃으며 그 눈가에 살짝 키스를 하고 윌의 다 리를 올려 자신의 허리에 감고는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악, 하고 숨을 참는 듯 한 소리가 났다. 윌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조심스레 그 깨문 이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물려주고 지크는 다시 천천히 진입을 시작했다. 시간을 들여 서 겨우 다 들어가고 나자 겨우 윌이 하아, 하고 길게 숨을 내 쉬었다. 딱 거기까지가 한계 였다. 지크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얕고 깊게 리듬을 바꿔가면서 윌의 몸을 파고들 었다. 앓는 듯 한 신음소리가 쾌락에 젖어 들어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 다. "난 아직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 지크가 윌을 안은 채 말했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서로의 체온으로 밤의 냉기가 올라오 는 것을 막고 있었다. 정사 후의 나른함이 온 몸을 덮쳐오는 것을 느끼며 지크는 윌을 당겨 서 어깨를 베게 해 주었다. 그리고 시트를 당겨서 목 아래까지 꼭 덮고 안아주었다. 윌이 파란 눈을 들어 지크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네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해줄 거라고 생각해. 그때는...... 네가 말하는 어떤 진실도 거짓도 모두 다 믿을게. 그리고 항상 한 결 같이 대할게. 나도 너에게 말해야 할 것이 많이 있고 사과해야 할 것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어쨌건 너와 결혼하면서 꼭 하고싶은 말은 이거야." 어느새 윌이 눈을 감고 있었다. 지크는 윌의 이마에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주며 중얼거렸 다. "자니?" 규칙적이고 조용한 숨소리만이 들렸다. 지크는 조심스럽게 드러난 윌의 이마에 입을 맞추 었다. "잘 자, 내 사랑." 소중하다는 듯이 그 어깨를 보듬어 안고 지크는 잠을 청했다. 어느 샌가 그의 품에 안겨있 던 소년이 눈을 뜨고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반투명한 레이스의 케노피 뒤로 밝아오는 창이 보였다. 여느 때 같 으면 두툼한 커튼에 가려 아침햇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햇살에 비쳐오는 것은 그녀가 왔기 때문일 터였다. "왔어요?" "응. 괜찮겠어?" "예. 이걸로 됐어요. 고마워요, 로드니." 침의를 걸친 채 윌은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꼼꼼하게 지난 밤 자신이 남긴 흔적을 남김없 이 치우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윌을 보고 있는 로드니의 눈동자 가 희미하게 떨렸다. 이내 할 것은 다 했다는 듯이 윌이 손을 내 밀었다. 로드니는 입술을 악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바람에 커튼이 휘날리고,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 다. 그리고 그날 아침 일어난 이들 중 전날 밤 무도회장에 나타났던 두 명의 미인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5화 제노아는 부풀어 오른 풍선마냥 들떠 있었다. 원정군의 개선을 축하하는 축제가 전 도시 를 휩쓸고 있었다. 시민들은 광장에 나와 춤을 추면서 왕궁을 바라보았다. 사흘 동안 그치 지도 않고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달도 없이 어두운 가운데 불이 환히 밝혀진 하얀 대리 석의 궁전이 활짝 핀 달맞이꽃처럼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불야성의 달맞이꽃은 새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사흘 밤 성에 불이 꺼지지 않은 이유는 에스토니아의 새 왕이 될 지크프리드 왕자의 신부를 찾는 무도회가 열리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용맹한 장군이자 위대한 왕이 될 태자의 사랑을 받게 될 아름다운 공주 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모두 기대감에 젖어 들었다. 그렇게 행복감에 젖어 있는 때에 사랑 은 쉬이도 찾아왔고, 제노아 인들은 사랑을 속삭이며 꿈같이 아름다운 사흘 밤을 지샜다. 왕자의 사랑도 그림같이 진행되었다. 첫 하루 모든 공녀들과 인사를 하고 자신의 사랑을 찾는 듯 단상위에 앉아만 있던 왕자는 둘째 날에는 단상에서 내려와 꽃 같은 공녀들의 손 을 잡고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뺨을 산호색으로 물들이며 수줍게 고개를 숙이는 그들은 건장한 왕자에게 안겨있어 더욱 더 꽃같이 가냘파 보였다. 왕자와 춤을 춘 아가씨들은 하 나같이 아름답고 우아하고 청초했다. 사흘 째, 무도회가 시작하고서 다시 전날에 춤을 췄던 아가씨들과 한 번씩 더 춤을 추던 왕자가 보드라운 갈색머리에 라일락같이 향기로운 보라색 눈의 공녀에게 두 번째 춤을 청 했을 때, 사람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공녀는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 고 이내 왕자가 내민 손에 목련 꽃잎처럼 흰 손을 얹었다. 모두가 흐뭇한 광경이라는 듯 뒤 로 물러서 홀 가운데를 비웠다. 샹들리에의 유리에 부서지는 빛의 줄기를 받으며 두 사람 은 세상에 단 둘밖에 없다는 듯이 춤을 췄다. 그는 그저 상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유사에 빠져 있는 것처럼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흐 르고 흘러 내려서 다리를 덮고 배위로, 어깨 위로 올라와 입으로 밀려들어오는 듯하다. 입 안이 모래를 씹는 듯 꺼끌 거린다. 그렇게 심드렁하게 등을 의자에 붙이고 있자 이내 그의 시종이 그에게 기별을 보낸다. 그제야 그는 일어서 연단을 내려간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여인들의 손을 잡고 뱅글뱅글 춤을 춘다. 마치 몸에 실이라도 달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는 듯이, 왕자는 그렇게 춤을 추었다. 가만히 앉아서 지금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첫날이 한계. 둘째 날이 되자 그의 시종은 왕과 온 왕국의 대신들이 모아 뽑아 온 공녀들 중에서도 가장 왕비에 걸맞은 이의 명단을 내밀 었다. 왕자는 그것을 받아들고 그날 밤 그 명단에 적힌 여인들과 춤을 추었다. 한번 씩 돌 아가며 춤을 추고서 그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또 시간이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기만 을 기다렸다. 그리고 셋째 날이 되었다. 방에서 나온 그에게 시종은 금장이 곱게 장식된 두루마리 하나 를 내 밀었다. 그 것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스토니아의 모든 중신들이 고르 고 골라서 뽑은 규수였다. 지크는 자신이 시종들에게 들은 설명과 어제 봤던 얼굴을 하나 하나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그 집안과 혈통, 학식을 되짚어 보자 누구에게 청혼할 지는 쉬 이 결정할 수 있었다. 매일의 일정을 끝내고 해가 뉘엿뉘엿 져 갈 쯤, 지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무도회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시종이 왕자의 건장한 몸에 검은 비단과 은장으로 장식 한 예복을 입혔다. 깨끗이 빗어 넘긴 검은 머리와 광택이 나는 검은 비단 옷이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호남이었다. 훤칠한 키와 반듯한 이목구비, 깔끔한 이마가 유난히 남자다워 서 남자라면 누구나 우러러 볼만한 모습이었다. 시종은 다른 어떤 날 보다도 더 멋지고 우아해 보이는 주군의 모습에 내심 만족해하며 받 침에 올라서서 왕자의 그 넓은 어깨에 흰여우 망토를 둘렀다. 망토를 오닉스와 백금의 핀 으로 고정시키던 중 시종은 왕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주색 비단 과 상아로 만든 작은 상자는 분명 에스토니아의 후계자가 정비에게 청혼을 할 때 쓴다는 유서 깊은 반지가 들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시종은 받침에서 내려와 진보라색 벨벳 쿠션 위에 그 상자를 얹었다. 왕자는 잠시 그 상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무도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종도 잰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음악이 끝났다. 보드라운 갈색 머리에 제비꽃 눈동자의 아름다운 공녀가 왕자를 올려다보 고 있었다. 춤이 끝났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왕자도 춤을 추면서 잡고 있던 손을 아직 놓지 않고 있었다. 왕자가 계속 손을 잡 고 있자 공녀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왕자는 가만히 자신이 쥐고 있는 손을 내려 보았다. 참 작은 손이었다. 꽃잎처럼 부드럽 고 거친 부분이라곤 전혀 없는, 왕자의 손의 반이나 될까 말까한 작은 손이었다. 왕자는 눈 을 감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어.' 왕자가 고개를 들어 단상을 올려보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시종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고서, 두 손에 반지를 넣은 상자를 받힌 채 날듯이 걸어 내려왔다. 왕자는 그제야 공녀 의 손을 놓았다. 공녀는 수줍은 듯 살짝 뒤로 물러섰다. 시종은 들뜬 마음을 애써 감추며 담담한 척 고개를 숙이고 쿠션에 받친 상자를 내밀었다. 왕자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상자 를 쥐었다. 천천히. 왕자는 키가 아주 컸다. 어지간한 남자들은 다 눈 아래로 내려 볼 듯 한 그 키 때문에 호사 가들은 "그는 내려 보는 눈빛에서 다른 이들이 절로 무릎을 꿇고 싶게 만드는 왕후장상의 기운을 내 뿜는다."라고 하고는 했다. 그래서 시종과 공녀는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차마 바로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원을 그리며 바라만 보고 있던 다른 이들도 그 거 리 때문에 왕자의 얼굴을 자세하게 볼 수는 없었다. 왕자가 아랫입술을 꽉 문채 울음을 참 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왕자는 반지 상자를 손에 쥐었다. 아픈 가슴을 애써 억눌러 참으며 왕자는 상자를 열었 다. 그리고는 그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 버렸다. "없어!" 없었다. 분명 첫날 모후에게 받고서 자신의 의무를 단 일각이라도 늦추기 위해 상자에 넣 어버린 채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는데. 반지는 온데간데없이, 섬세한 세공의 상아 상자는 텅 빈 채 빨간 비단 장식만을 뱀의 아가리마냥 벌리고 있었다. 모두가 어리둥절해서는 왕 자를 쳐다보았다. 왕자는 재차 말했다. "반지가 사라졌다!" 무도회장의 모두가 헛숨을 들이키고 탄식을 내 뱉었다. 공녀는 경악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시종은 놀라서 뒤로 나자빠져 버렸다. "설마.... 도둑? 도둑이 에스토니아 왕비의 반지를 훔쳤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웅성거리는 파문이 온 무도회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단상위에서 새파 래진 얼굴로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왕비가 왕의 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동이 트자 온 제노아가 불길한 소문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본래대로라면 이 새벽은 에 스토니아의 새 안주인을 축복하는 기분 좋은 설레임이 가득해야 할 것이었으나, 지난 밤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왕비의 반지가 도난당했다는 것이 밝혀지고는 온 제노아 성이 발칵 뒤집어 진 것이다. 아직 무도회가 한창이어야 할 달맞이꽃 같은 궁전에서 음악소리가 그치고 축제를 즐기고 있던 모든 병사들이 불려 나갔다. 한참 들떠있던 축제도 파장이 나버리고 사람들은 모두 수군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도난당한 반지는 에스토니아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한 반지였다. 대단히 로맨 틱한 사연이 많은 반지로, 대대로 왕과 왕자의 청혼 때에 어김없이 써온, 에스토니아 왕가 에 전해지는 반지 중 가장 역사가 깊은 반지였다. 다이아몬드가 꽃잎처럼 둘러 박힌 그 반 지는 일명 '흰 장미의 반지'라고도 불렸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여성들이 청혼을 받아들이 는 것을 "장미 반지를 받을 수만 있다면"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했을 정도였다. 그 반지가 에스토니아 사상 가장 위대한 왕자인 지크프리드 왕자의 청혼을 앞에 두고 도 난당했다. 유래 없는 흉조였다. 제노아 시민들은 혹시 이 일이 유토나 잔당이나 여러 소국 들의 계략이 아닌지 불안해했다. 왕궁은 더욱 소란스러웠다. 무도회는 중단되고 자국과 외국에서 온 모든 손님들이 왕궁 안에 억류되었다. 왕자의 청혼도 그 자리에서 미뤄지고 말았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녀 가 새 왕자비 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에스토니아에서 장미 반지를 받지 않은 왕비란 있 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밤을 새어가며 온 궁 안을 다 뒤지고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 로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리던 낭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반지도 도둑도 흔적 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채 날이 밝아 버렸다. 왕은 장미 반지를 찾을 때까지 손님들 을 억류할 것과 성안 모든 사람들의 짐을 샅샅이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본궁에서 멀리 떨어진 제노아 성에서 가장 한적한 화룡정에도 그 소란의 한 자락은 들려 왔다. 로드니는 제단 위에 외로 누워서 공물로 바쳐진 샴페인을 맛보고 있었다. 속으로 사 흘 전의 정말 예뻤던 윌의 모습을 떠올리며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왠지 그 예쁜 모습을 누구하나 아는 사람도 없이 자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시리 뿌듯해 졌다. 그렇게 노 닥거리고 있자 앞에서 윌이 두건과 허름한 옷을 껴입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 윌 어디 가?" "예. 본궁이 소란스러우니까요." "흐응, 여기도 할 일은 많은데. 아니 잠깐. 너 지금 손에 그거 뭐야!!" 휙 소리가 나게 날아가 윌의 손을 잡아채었다. 이것은 분명 사흘 전의 그 밤에 윌이 받았 던 '장미 반지'다. "너 미쳤어? 지금 본궁에 이걸 들고 가면 너 완전히 도둑으로 몰린다고!" "아...... 그래도 돌려주지 않으면......" "돌려주긴 개뿔이! 그 새끼가 이건 네 거라고 했다메!" "제 거였어요. 그걸로 족해요. 어서 돌려주세요." "안 돼!" "이제 더는 제가 가지면 안 되는 물건 이예요!" 로드니가 깜짝 놀라서 반지를 떨어뜨렸다. 처음으로 윌이 언성을 높이는 것을 들었다. 화 내는 것도 어쩜 저렇게 예쁠까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자 윌이 떨어진 반지를 주 워서 가슴에 매단 주머니에 넣었다. "지크 님이 정말 내가 비가 되길 원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이젠 내가 바라면 안돼요." 단호하게 뒤돌아서서 나가는 윌을 로드니는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동쪽 끄트머리의 화룡정에서 본궁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었다. 윌은 마음을 다지며 천천 히 단호하게 발걸음을 계속했다. 본궁의 전신이 보일 만큼 가까이 갔을 때 앞마당에 눈에 익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제노아 성의 하인으로 자신이 성의 축사에서 일했을 때 자주 마주쳤던 주방의 하인들이었다. 덧붙여 윌을 화룡정으로 좌천시킨 무리이 기도 했다. 저들끼리 모여서 수군거리는가 싶더니 윌이 눈에 띄었는지 보고는 얼굴에 화색 이 돈다. 그들이 손짓을 해서 윌을 불렀다. "윌! 어이 빨강머리! 빨랑 여기 와봐. 빨리 오라니까." "무슨 일이시죠?" "잘됐다. 화룡정은 할 일도 없을 거 아냐, 마침 잘 왔다. 너 주방 좀 도와라." "예?" "젠장 그 도둑놈은 왜 하필이면 그런 물건을 지금 훔쳐가고 난리야. 그것 땜에 지금 주방 이 완전히 전쟁터야, 전쟁터." "폐하가 무도회에 온 손님을 몽땅 다 억류시켰잖아. 그 손님들 오찬을 지금 전부 다 준비 해야 된다고. 너같이 할 일 없는 놈이 도와야지." "원래 세상은 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거야, 양파머리. 그러니까 빨랑 따라와라." 윌이 어어, 하는 새에 그들은 윌을 질질 끌고서 주방에 데려가 버렸다. 주방은 평소보다 사람이 두 배는 많은 것 같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시간에 쫓겨서 허둥지둥 일하고 있 었다. 마당까지 점유하고서 요리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니 이들의 말도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또 데려왔어!" "오오, 잘했어! 또 어디 좀 얼빠진 놈들 더 끌고 와!" "오케이! 더 분발하라고!" 경쾌하게 답하고서 그 무리들은 나가 버렸다. 윌은 이내 생각해 냈다. 자기를 데려온 사람 은 주방의 물류를 주로 담당했고, 그에 대답한 사람은 요리를 담당했었다. 저 둘이 주방의 가장 높은 두 사람이었다. 윌이 주저하며 서 있자 이내 주방장이 호통을 쳤다. "어이 얼바리! 멍하게 있지 말고 찾아서 일해. 네 옆에 있는 게 전부다 일이잖아!" 윌이 깜짝 놀라 주위를 슬쩍 훑어보았다. 옆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육수만 먼저 만들고 는 수프는 일단 미뤄두고 갔는지 재료만 듬뿍 쌓여 있었다. 윌은 그 앞에 서서 수프를 만 들 냄비를 찾아 아궁이에 올렸다. 재료 선반 위에는 수프를 담는 도자기 그릇과 은쟁반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중에도 왕과 왕비, 태자와 여러 왕자와 공주의 그릇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윌의 눈에 이채 가 어렸다. 그렇게 하면 반지를 돌려 줄 수 있어. 윌은 가슴에 매단 주머니를 오른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단호한 솜씨로 수프를 만들기 시 작했다. 수프가 먹음직한 냄새를 풍기며 끓고 있었다. 방금 전 전채를 담는 것이 반쯤 끝난 것을 보았다. 이제 수프를 담을 차례였다. 조리 되고 곧 나가게 하기 위해 음식을 담을 때는 여 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해댈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윌은 아직 사람들의 정신이 이쪽으로 쏠리지 않은 틈을 타서 수프 그릇과 쟁반을 늘어놓 고 수프를 담기 시작했다. 척보면 알 수 있는 왕가의 가족들의 그릇이 목적이었다. 아름답 게 세공된 태자의 그릇에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뿌연 수프가 찰랑거렸다. 윌은 그 안에 반 짝이는 반지를 빠뜨렸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다시 다른 그릇에도 수프를 채우기 시작했다. 한 두세 개 쯤 더 했나 싶으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냄비와 국자를 잡기 시작했다. 윌은 슬쩍 눈치 를 보다가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부디 수프를 끓인 사람 중에 자신이 있었다 는 것을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생선요리를 만드는 옆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윌의 바램은 다행히도 그대로 이루어 졌다. 누구도 이 공기같이 자 연스럽고 조용한 청년의 존재를 눈치 채지도 못했다. 오찬 좌석은 엄숙했다. 지난밤의 도난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분위기는 완전 가시방 석이었다. 넓은 홀에는 전날 밤 무도회에 참석했던 모든 귀족들이 참석해 있었다. 이런 분 위기의 식사에 참석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나, 불참한다면 그 도난사건에 연루된 사람으로 지목될 거라 생각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전채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전형적인 에스토니아 식의 식초를 친 굴 요리였다. 전채를 다 먹자 스프가 나왔다. "호오." 제법 맛있는 냄새가 나는 스프는 아직도 김이 날 만큼 따뜻했다. 육수와 말린 고기, 몇 가 지 뿌리채소를 주재료로 해서 대륙에서 가장 많이 먹는 종류의 스프로 서민들은 이것에 건 더기를 듬뿍 넣어서 식사 대신에 먹기도 하는 것이었다. 진한 육수냄새가 나는 뿌연 수프는 왕궁 오찬에 나오는 것 치고는 꽤 소박하고 토속적이 었다. 그렇지만 엊저녁부터 있었던 부담스런 일 때문에 잔뜩 긴장해 있던 그들에게 진한 냄새의 따뜻한 수프는 왠지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 같았다. 왕비도 파리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우는 것을 보고 왕은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은수저를 들어 맛을 보았 다. 단순한 맛이었지만 아주 가정적이고 따뜻한 맛이어서 왕은 나중에 주방장을 불러 칭찬 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지크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낯익은 수프였다. 사실 이 수프가 낯익지 않은 대륙인이 어 디 있겠느냐만 지크에게는 각별했다. 격렬한 전투가 있은 후 돌아오면 항상 윌이 김이 모 락모락 나는 이 수프를 만들어 주었다. 포기하려 했던 기억이 되돌아와 가슴이 아렸다. 지크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애써 누르고는 은수저를 들어 수프 그릇을 휘저었다. 달그락. 뭔가가 수저와 수프 그릇을 돌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수프을 먹지는 않고 멀뚱하니 있 는 아들을 왕과 왕비가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지크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수프 그릇 바닥에 가라앉은 것을 조심스레 수저로 떠내 보았다. "헉!" "아니 그것은!" 수프 그릇 안에는 지난 밤 도둑맞은 줄 알았던 장미 반지가 들어 있었다. 6화 주방은 한참 바쁘게 주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흡사 야전장을 방불케 하는 혼란스런 주 방에 때 아닌 불청객이 들어왔다. "주방장 어디 있나?" 홀 쪽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여섯 명의 병사가 들어왔다. 여느 때와 달리 시종도 아니고 병사가, 그것도 한참 바쁠 주방장을 찾자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주방장은 기름이 묻은 손을 수건에 비벼 닦고서 앞으로 나섰다. "내가 주방장인 케인이외다. 한참 바빠 죽겠는데 무슨 일이우?" "태자 전하가 찾으시오. 잠깐 우리랑 같이 가야겠습니다. 당신 말고 또 주방 책임자가 있 나?" "에? 저 물류 담당인 저기 저 노톤이......" "당신도 같이 가시죠." 빠르게 잘라 말하고는 병사들은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버렸다. 이내 시종이 따라 들어와 주방 사람들에게 말했다. 잠시 쉰 다음 오찬이 계속 될 예정이니 준비만 잘 갖추고 있으라 고. 갑자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끌려온 그들은 홀 한가운데서 무릎 꿇려지자 그제서야 뭔가 보통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 듯 했다. 여기저기서 불길한 수군거림이 들려오고 정수리 가 따가울 정도의 시선과 압박감이 느껴져 등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상석에는 왕 과 왕비, 그리고 태자가 앉아 있었다. 싸늘한 눈빛에 등골이 오싹하게 저려왔다. 앞에 나서 그들에게 물은 것은 얼음같이 파르란 은발머리의 젊은 시종장이었다. "오늘 수프를 만든 사람이 누구지?" "예?" 놀라서 고개를 들며 반문하니 죽일듯한 눈으로 내려 본다. 깜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조아 리고 두 사람은 수군거리며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어이, 쓰레기. 돌 적당히 굴리고 대답이나 하지?" 도련님같이 보이는 외모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표정 중, 성격은 아마도 표정을 따라간 모양이었다. 시종장의 가차 없는 말에 둘은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조아렸다. 잔뜩 위축 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을 보고 시종장의 옆에 서 있던 한 젊은 시종이 앞으로 나섰 다. 연한 금발 머리에 대단히 인상이 좋아 보이는 미청년이었다. "태자 전하께 바쳐진 수프 안에 장미 반지가 들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과연 누구를 의심 해야 하겠는가, 주방장?"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케인과 노톤은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거리며 떨기 시작 했다. 누구지? 수프를 만든 게 누구였지? 애써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수프를 만든 게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 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주방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부리는 사 람까지 있었는데 그걸 일일이 다 기억할 리가 없다. 케인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워낙 손대야 할 음식이 많아서 수프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다. 주방에서 처음 일하는 사람도 많았기에 일부러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각자 맡은 요리를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다녔었는데 수프는 누가 했는지 몰라도 막힘없 이 나가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게다가 향도 모양새도 나무랄 데가 없어 딱히 맛도 보지 않고 냈던 것이다. 분명 자기 휘하 부주방장 들 중 하나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기억해 내려고 하니 전혀 생각나지가 않았다. 노톤도 마찬가지였다. 들여야 할 재료가 워낙 많고 또 그것을 다 손질해야 했고, 다 된 요 리를 홀로 보내는 것도 노톤이 맡은 일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딱히 막히지도 늦지 도 않게 준비된 수프를 누가 준비했는지 알 리가 없다. 게다가 재료를 쌓아 놨을 때는 분 명 아무도 담당자가 없었고, 수프를 홀로 내어 갈 때에는 수프를 그릇에 옮겨 담느라 달라 붙은 사람이 열 명쯤은 됐다. 기억날 리가 없지 않은가. 식은땀을 흘리며 어찌할 지 궁리만 하고 있는데 갑자기 노톤이 소리쳤다. "윌 입니다." "어?" "윌 로 루쥬 라고 저쪽 내궁 동편의 화룡정에서 일하는 빨강머리 놈인데 제가 봤습니다. 그놈이 분명 수프를 만들었습니다." 부다다다 말해 부치는 노톤을 케인이 어리둥절해 쳐다보자 노톤이 고개를 숙인 채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신호를 보낸다. 한눈에 그가 하려는 말을 눈치 챈 케인도 덩달아 소리 쳤다. "예, 맞습니다. 그 빨강머리 놈입니다. 수프를 만든 건 제가 아니라 바로 그 놈이라고요." "그 녀석, 어느 시골에서 올라왔는지 몰라도 추천장도 없는 녀석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수상한 녀석이었다고요." "일손이 모자라서 불쌍해서 거둬준 거였다고요. 그런데 역시나 손버릇이 나쁜 놈이었던 거라니." 두 사람은 잔뜩 열이 올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한지로 좌천 시켜도 뭐라 한마디 대 거리도 못한 얼바리 녀석이다. 적당히 둘러씌우기엔 암만 생각해도 딱인 녀석이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어쩐지 출신이 불분명한 녀석 이었다는 둥, 항상 고개를 숙이고 눈을 못 마 주치는 것이 어째 찔리는 점이 있는 놈 같았다는 둥 그 빨강머리 윌이란 청년에게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뒤집어씌우기 시작했다. 시종장의 미간이 눈에 띠게 찌푸려졌다. 그 입에서 막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려는 순간 옆 에 있던 그 인상 좋게 생긴 시종이 앞에 나서서 말을 끊었다. "그만, 됐으니까 그 윌 로 루쥬라는 녀석을 데려오도록."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노톤이 나서서 재불거려 댔다. "제가 데려 오겠습니다. 병사들이 가면 도망칠 게 뻔하잖습니까? 알아 볼 리도 없구요." "그럼요,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 시끄러운 주둥이를 닥쳐. 너, 너 주방에 갔다 오도록." 시종장은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올리며 병사 몇을 찍어 명령했다. 재불대던 두 사람은 시 종장의 서슬에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홀 안은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공작새 마냥 차려입은 이들이 지지배배 거리며 귀엣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시종장은 잠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두 사람을 험악한 눈길로 내려 보다가 이내 고개 를 돌렸다. 때마침 아까 전에 자신을 막아섰던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그 능글맞은 부하는 예의 그 상큼한 미소를 다시 한 번 지어보였고, 그는 또 한 번 살심을 찍어 누르며 옆으로 눈짓을 했다. 그 끝에는 지크 태자가 있었다. 부하의 표정도 무엇인가를 떠올렸는지 진지 해 져 있었다. 저 두 사람의 말에서 느껴진 기억. 빨강머리, 윌 이란 이름. 아마도 저 부하 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아까 보낸 두 병사가 돌아왔다. 아직 덜 자란 몸의 십대 후반쯤으 로 보이는 청년을 양쪽에서 잡고 있었다. 홀 가운데에 내 팽개치듯 청년을 내려놓자 무릎 을 꿇고 깊게 머리를 조아린다. 기름과 음식물이 여기저기 묻은 허름한 옷가지, 재색의 두 건 사이로 보이는 빨강머리, 호리한 팔다리. 잠시 동안 그 청년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 둘 이 다시 나대기 시작했다. "저놈입니다. 그 손버릇 나쁜 놈이 저놈 이라구요." "출신은 속일 수가 없는 거라니까요. 저놈이 틀림없습니다." "그 이빨 다 뽑아내는 수가 있다." 헙, 하고 둘이 입을 다물었다. 청년은 어느새 수그린 몸을 세우고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그 도둑인가 봐요.' '인면수심이라더니, 역시 천한 것들은...' '에스토니아의 기보를 겁도 없이.'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살 같은 시선을 맞아가면서 청년은 꿋꿋이 견뎌 내고 있었다. 시종장은 잠시 그런 청년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이내 상석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가만히 앉아만 있던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모두가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지난 밤, 검은 머리에 검은 성장을 한 왕자는 그 분노하 여 납빛으로 질린 얼굴이 정말 귀신같은 형상이었다. 게다가 에스토니아 제일의 용장이라 는 지크 왕자다. 어떤 살벌한 일이 벌어질 지 절로 긴장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왕자는 성큼성큼 걸어 그자의 앞에 섰다. 괘씸한 도둑인데도 저 태자의 앞에 머리를 조아 리고 있는 것을 보자 절로 동정심이 일 정도였다. "내게 그리 장미반지가 오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것을 손에 쥐게 되었 을 때 생각했던 바는 있다." 왕자의 입에서 나온 그 높낮이 없는 말에 그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여 름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온 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끼며 모여 있던 사람들은 두 팔을 감싸고 외투를 찾아댔다. "그건, 내가 줄 장미반지는 그 한사람의 손에만 쥐어졌으면 하는 것이었지." 왕자가 그렇게 말하며 그 도둑과 눈을 맞추듯이 한 무릎을 꿇으며 앉자 모두가 긴장한 듯 이 입을 다물었다. 저 야차 같은 형상을 한 무시무시한 왕자와 눈을 마주쳐야만 하다니, 도 둑이 불쌍해 질 지경이었다. "그 사람의 손은 작지 않아서, 그 두 손이 내 양손에 가득 들어올 정도로 크지. 손바닥은 따뜻하고 홍조가 돌지만 손가락은 길고 차가워서 흰 자작나무 가지 같다고 생각했다. 그 손은 항상 나를 위해 일했기 때문인지 손가락이 길고 아주 우아한 흰 손이었는데도 항상 만지면 건조하고 까칠한 느낌이 들었었어. 그 손에 장미반지가 끼워진다면 겨울나무에 장 미가 핀 것처럼 참으로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며 왕자가 그 도둑의 손을 한 손으로 그러모아 쥐었다. 보던 이들은 다들 숨 을 헉하고 들이 쉬었다. 저 왕자가 한 사람의 손에만 쥐어졌으면 했다는 반지라면, 그것을 감히 훔치고 만졌을 저 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 손을 맨 손으로 쥐어뜯어 버리는 게 아 닌가 하여 모두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왕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랬는데...... 나의 몸은 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직했던 모양이구나." 왕자는 목이 막히는 듯 한 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 모두가 숨을 헉 하고 들이 쉬었다.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는 새에 너에게 그 반지를 쥐어주었다니." 그 철혈의 왕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창백한 회색의 얼굴에 겨울나무같이 희고 긴 손 을 부비며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자신들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부벼댔다. 그럼에도 그 신기루는 도통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는 왕자는 앞에 무릎을 꿇은 소년의 두건을 벗겨냈다. 순간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내가 너 외에 그 누구에게도 반지를 주었을 리가 없는데, 그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게 하 지 않았을 게 분명한데. 난 그 것을 네가 가진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빨강머리의 요정 같은 미소년이 왕자의 큰 납빛 손위에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후두둑하는 소리가 귀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귀부인들이 하나같이 부채를 바닥에 떨어뜨 리고 만 탓이다. 그러나 그 소리가 마치 스치고 지나갔다고 느낄 수밖에 없던 것은 눈앞의 그 광경이 워낙 눈을 의심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내리감아 긴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금빛으로 빛났다. 그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와 입 술에 맺히자 남녀 할 것 없이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왕자의 회색 손이 입술에 맺힌 눈물 을 닦자 소년이 눈을 떴다. 털썩하는 소리가 났다. 젊은 공녀들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까닭이다. 비에 젖은 에 메랄드처럼 촉촉한 초록색 눈동자는 현기증이 나게 아름다웠다. "나는 그리 명민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아서 언제 내가 너에게 이 반지를 주었는지도 모르 고, 또 이다음에 내가 너에게 이 반지를 준 것을 잊어버릴지 모른다. 내가 그 일을 모르는 이유도, 잊어버린 이유도, 그리고 그 전에 네가 사라진 이유도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장점이 없더라도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자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나 의 몸은 정직하니까 언제라도 똑같은 행동을 할 거야. 설사 내가 이 일을 다시 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는 다시 너를 찾아내고 지금처럼 똑같이 행동할거다." 그리고 왕자는 소년의 손에 입을 맞추고 반지를 꺼냈다. 왼손 약지에서 머뭇거리는가 싶 던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우고 왕자는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윌 스칼렛. 나의 비가 되어 주겠습니까?"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그런 소년을 보고 왕자가 굳은 표정으로 무릎 을 꿇고 재차 간곡하게 말했다. "진홍의 윌(Will of Scarlet), 부디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소년은 왕자에게 잡힌 왼손을 빼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한 손으로 뺨에 넘쳐흐르 는 눈물을 닦을 뿐이었다. 왕자가 다시 손을 뻗어 그 뺨을 닦았다. 소년이 소개를 좌우로 돌리며 왕자의 손을 피했다. 왕자의 얼굴이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제발 부탁이야." 왕자의 애절한 목소리에 눈물에 번진 붉은 얼굴을 들어 소년이 왕자를 쳐다보았다. 왕자 는 그 눈을 마주하고 다시 말했다. "나와 결혼해 줘, 윌." 그 말에 둑이 터지듯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다. 왕자는 그런 소년을 품안 가득히 안고 등 을 토닥거려 주었다. "아...... 아...... 전하, 난....... 난......"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 것도 보지 않아도, 아무 것도 듣지 않아도 상관없어.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내가 지켜줄 테 니까, 난 널 믿을 테니까. 그냥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윌. 나의 윌." 소년은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죽여 오열했다. 채 소리 내 울지도 못하는 연인을 품 에 안고 지크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모두가 숙연하게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새된 목소리에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노안을 찌푸리고 한 팔을 지팡이에 의지한 한 사람이 있었다. "뤼벡 공작, 대원로의장님......!" 그 눈은 병마에 시달린 듯 가득하게 눈곱이 끼어 있었다. 시선을 집중하고 똑바로 쳐다보 는 것이 힘들었는지 노공작(老公爵)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그럼에도 잘 보이지도 않 는 노안을 치켜뜬 힘은 전혀 남에게 굴함이 없었다. "지금 내가 들은 것이 에스토니아의 대황자께서 천한 하인을, 그것도 사내아이를 비로 삼 겠다고 하신 것인가? 그리고 지금 에스토니아의 유수 귀족 뿐 아니라 대륙 내의 내놓으라 는 대귀족과 왕족들이 그것을 묵인하는 것을 본 것인가? 대륙 초유의 경사가 되어야 할 자 리에 에스토니아의 사직을 끊어놓을 이런 망조가 어디 있는가!" 노공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해내자 그제야 사람들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 다. 사리에 맞는 말이었다. 어찌 비천한 하인, 그것도 사내아이에게 장미반지가 끼워질 수 있겠는가. 물론 저 미행을 나온 왕자와 같은 소년의 자태로 보아 비천한 신분이 결코 아니 리라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그 소년은 확연한 남자였다. 어찌 에스토니아 의 대황자와 결혼할 수 있겠는가. 소년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왕자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고 그 품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그 쓰라린 아픔이 묻어나는 표정에 보던 사람들 모두가 노공작에게 동조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으나 세상에는 동정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 었다. 애써 왕자를 밀어내는 소년을 왕자는 더 굳게 끌어안았다. 소년은 바르작거리며 그 품에 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 모습이 제 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주인 품에서 버둥대 며 벗어나려는 상처 입은 고양이 같아 보던 이들 모두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런 소년의 발버둥을 무시하고 왕자는 소년을 품에 가두고 그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묻 었다. 그리고는 노공작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노공작은 소년을 떨어뜨려놓기는커 녕 더 깊게 감싸 안는 황자를 보고 탄식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그 위대한 지크프리드 황태자께서 젊은 사내아이에게 빠져서 총기를 흐리신 모습이옵니까? 오,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로드니시여. 제 눈앞의 것을 부정 해 주시옵소서. 지금 저 요망한 어린 것이 벌써 이 많은 이들을 현혹하고 있사온데 그 것에 게 왕비의 위를 지워주시면 그 것이 이 에스토니아를 어찌 쥐락펴락 할지 너무도 명약관화 하지 않사옵니까!" 마지막 말에는 피맺힌 절규가 섞여 있었다. 노대신의 충정어린 간언은 뭇사람들의 심금 을 울렸다. 사람들은 이성적으로는 뤼벡 노공작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소 년을 보기만하면 그런 이성이 동정심에 추풍에 낙엽 흩날리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말 그대로 현혹되어버리고 마는 그 미모에 사람들은 애써 눈을 감으며 조국의 영복을 위해 서는 저 소년을 내쳐야만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여기저기서 눈을 감은 이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사옵니다. 대원로의장님의 말이 옳사옵니다." "전하, 차마 마음이 흔들릴까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사옵니다. 그런 자가 전하의 총기를 흐릴까봐 염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저자의 미모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피눈물어린 간언에도 왕자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이내 그들의 말을 중 도에서 끊고 왕자가 굳은 어조로 말했다. "설사 사직을 잇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에스토니아의 황자다. 나의 윌을 받아들일 수 없다 면 그 것은 사직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나도 왕위가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왕자로서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를 다했다. 성군이 되는 것이라면 내 동생 들도 자질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사직을 잇지 못할 내가 제위를 계승할 필요는 없는 것 아 니겠는가? 나는 죽은 것으로 알라. 황자의 임무를 다하고 내 애인을 데리고 명예도 권력 도 다 버리고 도망간 것으로 알란 말이다!" "전하!" "어찌 그런!" "어찌 저런 천한 자를!" "황실의 불명예입니다." "역사에 길이길이 웃음거리로 남을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서 읍소(泣訴)했다. 소년은 계속 울고만 있었 고 왕자는 종신들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때 소란을 뚫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내가 아끼는 아이라고 해도 그 아이가 하자가 있는가?" 홀의 중앙을 열풍이 가르고 들어왔다, 라고 사람들은 느꼈다. 당당하게 정문을 걸어 들어오는 이는 훤칠한 키의 붉게 곱슬 거리는 머리를 한 미녀였다. 단지, 미인은 아니었다. 그 미모는 분명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 이럴 수가. 로드니시여......" 세로로 긴 동공의 붉은 기 띤 금색 눈동자와 이마의 확연한 붉은 비늘자국, 몸에 달라붙 은 홍옥의 갑옷과 날개처럼 나부끼는 붉은 능라의 망토. 전혀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불깃이 휘날리듯 일렁이는 옷자락과 머리칼, 그리고 온 몸에 서 퍼져 나오는 붉은 광채와 열기. 전신이 찌릿찌릿하게 느껴지는 위압감. "이 화룡공주 로드니가 아끼는 아이라고 해도 그 아이가 하자가 있느냔 말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앞에 일제히 모든 에스토니아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에스토니아의 모든 가신이 위대한 에스토니아의 수호신 로드니 공주마마를 뵙사옵니다." "적어도 눈은 제대로 박혀있는 것 같구나. 기쁘다." 그리고 그녀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홀의 가운데로 나아갔다. "그래, 아가야 어쩌겠느냐. 나의 귀여운 꼬마는 네 곁에 있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고, 너 의 사랑스런 백성들은 네 연인의 존재조차 부정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소중히 여기는 건 우리 귀여운 꼬마뿐이니까 난 우리 꼬마가 원하는 대로만 해 줄 것이다." 혹시나 뺐길까 불안해하는 어린 아이처럼 지크는 품안의 윌을 힘껏 끌어안았다. 온 몸이 찌릿찌릿하게 위압감이 느껴졌다. 지크는 애써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쏘아보며 품안의 윌 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내 꼬마가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사흘 전 밤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느 냐?" "몰라." "짐작은 하고 있겠지. 넌 영특한 아이니까. 넌 잊어버렸어. 그래, 그게 내가 한 일이다. 그 리고 내 꼬마는 지금도 그걸 원하고 있어. 자 어떻게 할래, 아가? 난 어차피 네 말은 안 들 어." "내가 뭘 할 수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잖습니까? 난 그저 똑같은 걸 반복할 뿐입니다. 또 반지를 찾아다닐 테고, 또 그 반지를 주지 못해 망설여 댈 테고. 그리고 또 이 녀석을 찾 아다닐 테죠. 바뀔 게 또 뭐가 있습니까? 난 그렇게 똑똑한 녀석도 아니고 강한 녀석도 아 니니까 그런 것밖엔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지크는 똑바로 로드니를 쏘아 보았다. "또 그렇게 해봐. 나는 어차피 또 똑같이 행동할 테니까. 아니 이미 몇 번이나 그랬는지도 모르지. 어차피 난 무력하잖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발버둥 칠 테니까!" "흥......." 로드니는 지크에게서 눈을 떼어 윌을 바라보았다. "꼬마. 어떻게 할래?" 윌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로드니는 애써 피하는 그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 다.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내가 왜 이렇게 했는지 너는 알고 있어. 그 모든 게 무엇을 위해 서였는지도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잖아." 로드니는 조용하게 말했다.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어." 로드니가 윌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두 뺨을 적시고 있던 눈물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 렸다. 그대로 뺨을 감싼 채 로드니가 다시 말했다. "윌. 무엇을 원하지?" "사랑을...... 원합니다." "잘했어. 우리 꼬마." 로드니가 윌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 꼬마는 이 녀석의 곁에 있기를 원했다. 자, 또 누가 내 말에 거역하겠는가?" 누구도 감히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로드니는 도도하게 턱을 세우고 말했다. "감히 누가 내가 아끼는 아이가 왕비가 되는 것에 거역할 것인가?" 순간 놀란 숨소리와 수군거림이 튀어나왔다. 경악성이 홀 안을 가득 매웠다. 윌이 로드니 의 옷자락을 잡고 놀라서 외쳤다. "로드니!" "시끄럽다! 감히 내가 아끼는 아이를 범부의 애인으로 내어 줄 줄 알았는가? 이 홍옥의 천 사를 얻고 싶은 인간이 있다면 제왕이 아니라면 허락할 수 없다!" 지크와 윌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드니를 쳐다보았다. 로드니는 그런 경악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언했다. "이 아가는 그나마 인계에서는 가장 나은 왕이 될지니라.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내가 허락 지 않았으리. 어렵게 얻은 사랑을 보배로이 여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진실로 내어 주고 싶지 않았나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로드니는 말을 이었다. "내가 후견하는 인계의 것이 아닌 아이이니 이 아이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다가는 아무리 내 슬하에 오래 있었던 너희라 해도 용서치 않으리라." 그렇게 말하며 로드니는 손을 모았다. 천사의 고리 같은 빛의 관이 그 두 손 위에 나타났 다. 로드니는 그 관을 지크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나, 화룡공주이자 에스토니아의 수호신인 로드니가 고른 황제는 지크프리드 뿐이리니 감 히 거역하는 자가 없으리라." 대제국 에스토니아의 전성기를 시작했던 정복왕 지크프리드 6세와 대명비(大明妃) 윌 왕 비의 대관이었다. 3부 코랄의 폭풍(storm of coral)에서 계속.